이정자 시인

이정자 시인
이정자 시인

[동양일보]탄금대 산책로를 따라 걷는데 햇살을 품은 대지는 곧 기지개를 켤 듯 바람결이 한결 따사롭다. 눈에 들어오는 벚나무 층층나무 때죽나무도 이제 곧 연두빛 싹을 띄우고 새들이 지저귀는 봄날이 올 것이다. 그런 희망에 발걸음도 가벼운 날, 고 오탁번 시인의 따님 가혜씨로부터 소포가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궁금한 마음에 집에 도착해서 소포부터 풀었다.

시인의 1주기를 맞아 묶어낸 말년의 시 세계가 담긴 유고 시집 <속삭임>과 시인의 갑년 이후 시 작품들에 대해 여러 비평가와 연구자들이 쓴 글을 모아 엮은 <좋은 시는 다 우스개다>두 권의 귀한 선물이었다.

시인을 처음 직접 뵌 곳이 2004년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에 있는 원서문학관이다. 어느 날 충주 이현복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오늘 오탁번 교수님 텃밭에 심은 고구마 캐는 날이라며 함께 갈 수 있느냐고 했다. 시인과 아내이신 김은자 시인님, 이 시인과 나 이렇게 넷이서 한 고랑씩 차지하고 나가는데 고구마를 캐는 내내 오 시인께서 어찌나 위트와 유머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던지 동심으로 돌아가 소풍 나온 기분이었다.

슬그머니 사라졌던 부인께서 어느새 손수 만든 요리와 찐 고구마를 한 상 가득 들고 오셨다. 돌아올 때는 친정어머니가 딸자식 챙기듯 손수 지으신 고구마와 푸성귀들을 바리바리 싸주셨다. 그때 문학관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서 함께 담은 몇 장의 사진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2023년 2월 14일 시인의 부음 소식을 듣고 한국 문단의 또 하나의 별이 지는 슬픔에 우리는 망연자실했다. 장지인 제천 개나리 추모 공원에는 허형만 최영규 김왕노 정영숙 김영찬 이영식 등 한국시인협회 회원들과 충주 문인들 그리고 시인을 애도하는 많은 이들이 모여 들었다. 빛나던 한 시인의 주검이 작은 항아리에 담겨 봉안되는 동안 모두는 숙연했고, 저 세상에서의 평안을 기원했다.

가까이 살면서도 코로나19로 얼굴 한번 뵙지 못한 것이 더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날 따님 가혜씨 큰 눈망울의 눈물과 마주치자 참았던 울음이 울컥 쏟아졌다. 돌아오는 길에 평소 고인과 각별하셨던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님과 충주의 시인들, 그리고 초등학교 후배들 몇은 문학관이 있는 백운에 들러 저녁 식사를 하며 시인의 생전을 회상하며 소주잔을 기울이며 마냥 섭섭함을 달랬다.

유고 시집 <속삭임>을 읽어 내려간다. 암을 선고 받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청천벽력 같은 상황에서도 시인은 시를 쓰고 다듬었고 마지막 순간이 임박해 있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유머러스하게 시를 승화하고 있다. 시인의 소탈한 성품과 가늠할 수 없는 정신의 높은 경지에 또 다시 존경심이 인다.

어느새 돌아가신지 1년이 지났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원로시인의 그 표정과 모습은 갈수록 선명해짐을 어쩌랴.

추억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끈이다. 추억은 아름답고 힘이 세서 그 추억의 힘으로 오늘, 지금, 이 순간이 빛난다. 고로 오늘은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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