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문학평론가

이석우 문학평론가

[동양일보]러일전쟁 후 일본은 영국·미국·러시아 등과 조약을 통해 보호권을 승인받고 나서 1910년 한국을 합병하였다. 동아시아의 두 팽창주의가 충돌한 러·일 전쟁은 한국을 불행의 소용돌이에 휘몰아 넣기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이 전쟁은 1904년 2월 일본이 여순항을 기습하면서 발발하였다. 한국은 이미 일본 군사 점령지의 거미줄에 갇혀 있었다. 이는 1903년 9월 30일 자 군령해(軍令海) 제1호 "방비대 조례”에 의해서‘진해만 송진포방비대'를 설치한다는 기사에서 확인된다.

이어 일본은 진해만을 해군기지로 만들기 위해 1904년 8월 11일 거제시 송진포 일대를 일본해군용지로 편입하고 송진포 주민들은 강제이주 시킨다. 그리고 1905년 1월까지 포대공사를 마무리하면서 진해만방비대 사령부, 병원, 화약고, 일인 학교인 송진소학교 등을 세워 거대한 군사기지로 탈바꿈시켰다.

본격적인 러·일 함대의 포격전은 1905년 5월 27일 시작되었다. 새벽 2시 러시아 발트 함대의 병원선과 순양함이 짙은 안개 속을 뚫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4시경에 이르러 대규모 함대를 확인한 해병은 본대로‘러시아 함대 발견’이라는 타전을 날린다. 이어 거제도 송진포에 있던 일본 해군기지에서 이 급보가 본국으로 송출되었다. 대한해협에서 러·일 해전이 드디어 발발하였다.

도고는 즉시 전 함대를 출격한다. 조심스레 러시아 함대를 이동 추적하던 일본 연합함대는 해협의 병목 지역에 다다를 때를 기다려 그 앞을 빗겨 막고 포문을 열었다. 이순신 장군의 울돌목 작전이 큰 학습효과를 발휘한 순간이다.

당시 교전에서 양측 함대는 동북향으로 동시에 항진 중이었는데, 러시아 함대는 한쪽 열을 뒤처지게 배치한 2열 종대를 유지하였다.

이에 대적하는 도고의 일본 함대는 앞을 가로막을 수 없으니 학익진을 원용한 “T진형(丁자진형)”을 선택한다. 러시아 2열 함대 선두에 집중적으로 화력을 쏟아부었다. 이순신 장군이 학의 양 날개를 쫙 펴고 왜병의 선두 함선을 콩가루로 만들던 그 전황이 재현되었다. 일본 해군이 이순신 전술을 끊임없이 연구한 결실로, 승리의 영광을 낚아챈 것이다.

당시 러시아함대 함포들은 높은 명중률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석탄을 잔뜩 싣고 있던 러시아 함대는 기민성이 떨어진 가운데 180도 회전(알파 선회)하면서 명중탄을 날릴 수 없었다. 더군다나 뒤따르는 후미의 전함은 사거리가 미치지 않아 일본 전함에 닿지 않는 포탄만 떨구고 있었다. 결국, 이 해전은 러시아 함대가 절멸하고 일본의 대승으로 끝났다. 이 승리 속에는 이순신 장군의 후예인 한국 출신 해병들이 상당히 끼어 있었다.

『해상권력사강의,1902』의 저자는 이순신은‘일본군이 반걸음도 서진하지 못하게 한 장수'라고 평가하는가 하면, 진해 주둔 일본 해군은 통영의 이순신 사당 충렬사를 찾아 제사까지 올렸다고 한다. 도고 제독은“나를 영국의 넬슨과 비교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순신과는 비교할 수 없다.”라고 기자들에게 말하였다.

1931년 송진포에 도고 헤이하치로의 친필‘러·일전쟁 승전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비는 해방 후 철거되어 장목파출소 입구 계단으로 사용되다가 1980년부터 거제시청 창고에 보관 중이다. 도고를 추앙하는 일본인들은 창고보관 도고 기념비와 똑같은 비를 만들어 도고 고향에 건립했다. 또한 그들은 1912년 송진포에 조성된 도고의 ‘전쟁기념비 공원’에 이 기념비를 복원해 달라고 난리다. 일본인들은 이순신 장군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물리친 군신(軍神)으로 추앙하더니, 1905년 ‘대한해협 해전’승리 후, 도고 헤이하치로를 내세워야겠다고 마음을 바꾼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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