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 논설위원 / 소설가

박희팔 논설위원 / 소설가

[동양일보] 돌아갑시다. 돌아갑시다.

재미있는 시간이 벌써 지났네.

1반, 2반, 3반, 4반 돌아갑시다.



이건 내가 서울서 초등학교 다닐 때 부르던 노래다. 60여명 조무래기 학생들이 모두 일어나 네 시간 공부시간이 끝나고 이 노래를 불렀다. 이 하학의 노래를 남녀학생들은 기운차게 불렀는데, 이제 학교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희망 때문이다. 학교생활은 집의 생활보다 시간에 매여 있어 그런지 독립된 집 생활이 더 좋았던 모양이다. 그 생각이 이제 이 생극의 정김말로 피난을 와서 3월이 지나도록 학교를 못가니 그때가 그리워졌다. 서울의 초등학교에선 3학년 다니던 때 6.25가 나 학교를 그만 두는 바람에 그 하학의 노래도 끝이 나 그 학교 다니던 때가 생각난 것이다. 그래서 엄마에게 졸랐다. “내 동무 금익인 아침이면 책가방 들고 학교 가는 거 같애. 요 00에도 초등학교 있잖아 나 그 학교 넣어 줘 응!” 이 내말을 듣고 엄마는 큰언니에게 얘기해서, 엄마보다 4살 위의 큰언니는 내 손을 잡고 다리 건너 00초등학교에 가서 교무실애서 수속을 끝내고 나를 어느 성생님에게 인도하더니 그 선생님은 나를 어느 교실로 데리고 갔다. 선생님은, “네 성명이 박선팔이라고 했지 그런데 사촌형님 되는 이가 요 곤제 사신다고 했는데 그분의 성함을 써봐!” 했다. 나는 백묵을 잡고 칠판에 ,박선순(朴膳淳)‘ 이라고 한자로 썼다. 그리곤 교실의 학생을 둘러보니 금익이가 뒤쪽에 앉아있으면서 얼굴에 웃음기를 띠고 있는 게 보였다. 한문으로 사촌형님의 성함을 쓴 것을 보고 선생님은, “사촌형님의 성함을 한문으로 쓰는 걸 보니까 공부도 잘하겠군.” 하더니 금익이를 보고는 “오늘부터 이 친구하고 공부하면 되겠네.” 하곤 웃어 보였다. 이렇게 해서 00초등학교 3학년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금익이와는 더욱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숙제도 같이 하고 놀 때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첫 봄소풍을 0뎀이라는 곳으로 갔는데 거기엔 엄마하고 갔던 곳으로, ‘구렁이가 담 넘어 간다’ 는 데다. 그때 엄마와 같이 갔던 집의 질부는 이 사촌형님의 셋째 며느리니까 나에겐 5촌 질부였던 거다. 그 친정부친이 이 0뎀이에 살고 있으면서 유지였다. 그때는 난리 통이라 그 5촌 조카는 이 5촌 질부의 친정이 마련해준 0뎀이 에서 살았던 것이다. 하여 여기는 소풍 때 처음 와본 곳이 아니다. “넌 서울서 피난 온 애가 이 0뎀이라는 델 어트케 그리 잘 알아!” 금익이의 그 말에 일일이 우리 집 이야기를 해줄 수 없어 그냥 두루뭉실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엄마와 큰언니와의 관계를 다시 떠올렸었다. 엄마나 큰언니나 기구한 운명의 장난은 거기가 거기라는 생각을 다시 했다. 이 둘의 관계는 어린 내 생각엔 엄마는 내 엄마 큰언니는 내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실제도 엄마는 어려운 일을 큰언니에게 맡기었고 큰언니도 우리에게 아버지 역할을 도맡아 했던 거다. 금익인 이 기회에 제 아버지에게 우리 집 사정을 물어 들었던지 그 소풍날 다음부터는 내 집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친분만 더 높였다. 가령 이러한 거였다. 학교공부가 끝나면 나한테로 와 숙제도 같이 하고 그간 학교의 일을 세세히 나에게 알려주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교장선생님이 어제 갈려 가는지 담임선생님 댁이 어디라는 것 등등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제집이야기도 해주었는데, 아버지 이름이 ‘넴이’인데 이건 어렸을 때 할머니가 이 금익이 아버지가 송아지를 끔찍이도 사랑했기 땜에 아주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고 하면서 여기에 기인했다는 거다. 그러면서도 제 아버지의 본 이름은 말하지 않아 나도 그냥 ‘넴이’ 라고만 알고 있고, 동네사람들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제 누이가 하나 있는데 두 살 터울이라 했고, 이름이 ‘금간이’ 라는 것은 동네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어서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여하튼 금익이는 나와는 동갑으로서 가장 친한 친구였고 하루도 떨어지지 않는 사이였다. 키는 나보다 훨씬 커서 마치 꺼꾸리군 장다리군 같아서 동네사람들이 놀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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