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애정 시인·충주 문향회장

안애정 시인

[동양일보] "자기야, 나 바다가 보고 싶어"

30년 전 늦가을에 결혼하고 충주에서 길고도 추운 겨울을 보낸 어느 봄날, 따듯한 남실바람이 살랑거리며 다가왔다. 햇살은 무량하게 쏟아지고 흙살이 부드러운 양지에서는 제비꽃이 올라오고 있었다.

멀리 있는 남도의 땅, 영광에 가고 싶었다. 친정집 마당에 서면 멀리 바다가 보였다. 파도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가시거리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 좋았다. 산책 삼아 쉬엄쉬엄 걸어가면 되는 거리에 바다를 두고 살았는데…. 지금 살고 있는 충주 주변은 온통 산이었다.

바다에 가고 싶었다. 카푸치노처럼 부드럽게 밀려오는 파도에 발목을 담그고 걷고 싶었다. 발바닥을 통해 올라오는 찬 기운을 느끼며 한없이 걷고 싶었다. 하지만 충주는 바다가 없는 내륙의 도시다. 고향에서는 마당에서 서면 지척에 바다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바다를 보기 위해서는 몇 시간 동안 차를 타고 가야만 했다. 지금이야 내 차로 2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바다가 결혼해서 살기 시작한 첫해에는 너무 멀었다.

토요일 아침,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남편이 아침을 먹고 난 후에 갈 데가 있단다. 어디 가냐는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고 보일 듯 말듯 미소만 짓는다. 조금은 덜컹거리는 낡은 시내버스를 타고 갔다. 차창 밖으로 낯선 풍경들이 지나갔다. 한참을 달려 충주 시내를 벗어나자, 강 하류가 보였다. 새까만 큰 돌들이 듬성듬성 누워있는 넓은 강물이 나타났다. 그리고 콘크리트 담에 둘러싸인 댐에 도착했다. 충주 댐이었다.

“미안해, 충주의 바다는 여기야”

“뭐?”

남편이 미안해하는 표정을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웃음이 나왔다. 그날 이후 충주호는 내게 바다가 되었다.

충주호는 충주시, 제천시, 단양군에 걸쳐 펼쳐진 큰 인공호수이다. 내륙의 바다로 불릴 만큼 담수량이 많아 댐 가에 서면 정말 바다처럼 보인다. 충주댐 나루터에서 단양까지 달리는 쾌속 관광선을 타면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 때가 있다.

아름다운 노을과 바닷물을 가르고 올라오는 해맞이를 할 수는 없지만 붉은 햇살에 물드는 강물을 보여준다. 그리고 백마처럼 흰 갈기를 세우며 달려오는 파도는 없지만 찰랑찰랑 물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흘러가는 저 강물이 남한강 길을 달려 한강에 이르러 언젠가는 서해에 닿는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충주호는 나에게 바다가 되었다.

신혼 때는 둘이 다녔고, 세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바다가 보고 싶을 때는 주저 없이 늘 충주호를 향했다. 넓게 펼쳐진 잔디 위에서 김밥도 먹고 커피도 한 잔 마시며 주말을 보냈다. 그리고 아장아장 걸었던 아이들이 자신 머리보다 더 큰 축구공을 차며 넘어지고 일어나며 성장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제 밥벌이를 하며 살고 있다.

요즘 충주호의 풍경이 전과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충주호는 내가 바다가 보고 싶을 때 가장 빨리 닿을 수 있는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내 바다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