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동양일보]그의 무덤을 다녀왔다.

꽃샘바람이 빈 가지를 흔들던 겨울의 끝, 괴산군 청안면 백봉리 사과나무골에는 잔설이 녹은 계곡물이 맑게 흘렀다. 그는 그곳 볕 좋은 산비탈에 누워있었다. 봉분이 없는 평장 앞에는 검은 돌에 “그림 좋아하던 황창배 여기서 그림 그리다 가다”라는 비문이 적혀있었다. 황창배 작가의 글씨를 집자해 만든 비문이었다.

비문처럼 그는 이곳에서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을 불태우듯 그림을 그리고 떠났다. 많은 그림들이 이곳에서 탄생됐다. 그가 떠난 지 23년.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잊지 못한다.

아니 그가 남긴 그림은 전설처럼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홀린다.

황창배가 누구길래, 그의 그림이 어떻기에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고 그의 그림이 사랑받는가.

소정(素丁) 황창배는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 재학시절 충주출신인 월전 장우성에게 동양화를 배웠고, 졸업 후 철농 이기우에게 서예와 전각을 사사했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의 인장을 두루 새겼던 철농은 그의 장인이 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스타작가’였다. 서른 살이던 1977년 국전에서 문공부 장관상을 받았고, 이듬해인 1978년 한국화 최초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30대 중반에 교수가 돼 경희대 동덕여대, 이화여대에서 명강의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이력과 달리 그의 작품 세계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밀가루로는 빵만 만드는 게 아니라 국수나 수제비도 만든다”던 그의 말처럼 그는 자유분방한 작품으로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허물었다. 동양화라는 고정관념의 제약을 버리고 ‘종이’와 ‘먹’ 대신 캔버스에 아크릴이나 유화물감 심지어는 연탄재, 흑연 가루까지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고, 서구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등 다양한 사조를 끌어들였다.

그의 파격적인 행보에 화단은 그를 ‘한국화의 이단아’ ‘한국화의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 그가 이화여대 교수직을 미련없이 버리고 백봉리에 칩거하며 작품에 몰입했을 때 동양일보가 그의 작업실을 찾아 취재를 했었다. 당시 그는 괴산으로 온 이유를 “충청도의 소박함과 구수함이 좋아서였다”며, 그를 따라다니는 화려한 경력은 한낱 먼지 같은 겉치레일 뿐, 자신은 스스로의 예술과 혼을 일정한 틀에 가두어두지 않고 작업에 몰입할 때 새 생명으로 태어남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예술은 법칙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의 무법(無法) 철학은 그림에 대한 틀과 관습을 깨뜨려 그의 그림을 강물처럼 흐르게 했고, 날개를 달아 하늘을 날게 했다. 괴산에서 만난 자연, 꽃, 산, 들, 자신의 일상과 생각 등 모든 것들이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그림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그는 말했다. “제 그림은 주변의 느낌이 몸에 녹아 나오는 일기장일 뿐입니다.”

그는 또 화가로서 방북 1호 작가이기도 했다. 1997년 12월 ‘북한문화유산조사단’의 일원으로 방북한 뒤 꼼꼼히 스케치를 해와서 다양한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김달진미술연구소는 한국화의 경계를 확장한 선구자 황창배를 ‘재평가해야 할 한국화가 1위’로 선정했다.

2001년 담도암으로 훌쩍 세상을 떠난 후 그가 작업을 하던 백봉 아틀리에는 이제까지 비어있다. 금방이라도 그가 다시 그림을 그리러 돌아올 것처럼 물감이며, 붓이며 그림을 그리던 도구들도 그대로 놓여있다. 그동안 화백의 아내 이재온 여사(황창배미술관 관장)를 비롯한 유족들이 차마 이곳을 정리하지 못한 이유는 “밋밋하지만 흠뻑 빠져들게 하는 충청도의 산과 들, 수려하지는 않지만 적당하게 아름다운 땅, 이웃들이 좋아 이곳을 사랑한다”던 황창배 화백의 마지막 생애와 미술혼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어린이 미술대회를 열고, 젊은 화가들이 찾아와 작업을 하며, 미술탐구를 하는 등 괴산의 그림쟁이 황창배 화백이 못다 피운 미술의 꿈이 재현되기를 소망한다. 그런 이유들로 황창배미술재단이 만들어진다고 하니 그 꿈이 기대된다.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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