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을석 청주 봉덕초 교감

박을석 청주 봉덕초 교감

[동양일보] 학교로 내려온 한 장짜리 공문에 화가 났다. ‘감사 지적사항 발생에 따른 출장 복무 사용시 주의 사항 안내’라는 긴 제목의 공문. 국민권익위원회 출장여비 실태조사 결과 지적사항이 있어 주의사항을 알린다는 요지이지만, 안내된 5개 사항 일부는 기존 복무관리 요령과 다르고, 불필요한 노동을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출장시간이 변경되거나 취소되면 변경신청 및 출장취소 처리, 강의료에 출장비 포함할 경우 ‘여비 지급하지 않음’ 으로 출장 신청 등은 기존과 동일하고, 왕복 2㎞ 이내 근거리 출장을 실비 지급하라는 것은 통상 여비 부지급 처리하던 것과 달라진 부분이다.

그런데 ‘2인 이상 동일한 목적으로 출장을 가는 경우 개인별로 출장 신청하여 개인 출장관리 책무 강화’라는 구절은 이해가 안 된다. 복무시스템에 동반 출장을 가능하게 해놓고선 쓰지 말라는 것이며, 아무리 많은 인원이 동일 목적으로 동일 장소를 가든지 무조건 개개인이 출장 신청을 하라니…….

덕분에(?) 참으로 쓸데없는 일을 반복하게 되었다. 교대생의 교육실습을 준비하는 지도교사 연수가 청주교육대학교에서 열리는데, 이곳으로 가는 출장을 21명이 개별로 신청하고 결재자는 또 개별로 결재해야 했다. 일괄 결재 기능이 있고, 이 기능 사용이 금지되지 않았지만, 출장 신청을 하는 시점이 같지 않아 한 번에 처리가 불가능하였다.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신학기 학습준비물을 챙기고자 인근 문구점에 학급 담임교사가 출장을 가야 하는데, 24학급의 담임들이 다 개별로 출장을 신청하고 그때그때 교무부장과 교감이 승인을 해야 했다. 총괄업무 담당자가 일괄 기안을 하고 단건 처리하면 될 사안을 연인원 40여 명이 달라붙어 일을 하게 하다니, 도대체 뭐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사이버 감사 메뉴를 이용, 출장시간 중 사무실 내부시스템 접속기록 조회 가능함에 따라 실제 필요한 시간만큼 출장 신청’이라는 대목은 실제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도 못하는 데다 교육청에서 감시할 테니 잘하라는 식이어서 불쾌하기 짝이 없다.

준비시간, 이동시간을 감안하여 출장시간을 상신하여 놓고도 출발 직전에 이러저러한 요구나 상황에 대응하느라 제 시각에 출발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또 출장을 나갔다가도 일찍 업무가 종료되거나 급한 일이 생겨서 조기 복귀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때마다 절차에 맞게 하려면 출장신청을 재기안하여 결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복무 사항과 관련해서는 주의 처분만 받아도 표창 상신조차 금지되는데, 복무 지침을 이렇게 시달하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인지 모르겠다. 상급기관의 어떤 지적만 있으면 현장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공문을 시행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3월도 열흘이 지났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모든 일이 문서로만 이뤄지지 않고 문서 밖에서 해야 할 일이 더 많지만, ‘행정은 문서로 한다’는 행정문서주의를 생각하며 학교에서 처리한 문서를 일별해 본다.

우리 학교의 경우 문서등록대장 기준으로 단 2주 동안 931건의 공문을 처리하였다. 그중 501건을 접수하고 430건은 생산하였다. 근무일이 10일이니 하루 93건 처리, 43건 생산이다. 문서 기안자뿐만 아니라 결재자에게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인사, 복무, 학사 관리 등에 활용되는 NEIS에서도 수많은 기안과 결재가 이뤄진다. 교감을 거쳐간 결재만 해도 247건이다. 복무 사안과 시스템 권한 신청이 주를 이루는데, 대략 하루 25건 정도다. 그런데 한 건 기안에 많은 경우 70~80건이나 되는 세부 항목을 포함하는 사안도 있다.

이 밖에도 체험학습 신청 및 보고 건이 36건, 행정정보시스템을 이용한 결격사유, 범죄전력, 성범죄 및 아동학대 범죄 조회도 수십 건이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누가 아이들을 바라보아야 할 눈을 컴퓨터 모니터로 향하게 하고 아이들 손을 맞잡아 주어야 할 손을 키보드로 향하게 하는가. 이런 학교 모습이 언필칭 미래교육에 부합되는 것인가.

‘의미 없고 끝없이 반복되는 노동’이야말로 신이 내린 가장 심한 형벌이라는 코멘트가 떠오른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에 나오는 말이다. 학교에 불필요한 일을 요구하고, 수많은 문서를 투하하는 행정이, 과연 교육을 살리고 교육을 키우는 일인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그 길의 맨 앞장에 교육청이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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