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형은 중원미술가협회장
문형은 중원미술가협회장

 

[동양일보]“마르크스라고?, 아냐!, 맑스라고 불려야 맞지.”

과거 학창 시절에 운동 때나 했다는 사람들이 종종 했던 말이다.

마르크스는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한국어에 옮긴 것이고, 맑스는 독일어 원음에 가깝게 옮겼다는 것이 그들이 주장이었다.

어떤 학내 동아리는 날씨가 ‘맑다’와 미래는 ‘맑스주의자’의 의미를 합친 ‘내일은 맑습니다’라는 중의어로 자신들의 행사를 알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처럼 심오한 생각을 하는 이들 중에 마르크스의 원문을 그대로 독파한 사람은 거의 없다.

수식만 없다뿐이지 경제학적 원리와 철학의 비율을 현란하게 섞은 <자본론 Das Kapital>은 대학생 수준에 읽기 어려운 고전이었다.

마르크스를 위대한 혁명 사상가라고 존경하면서도 정작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마르크스는 어떻게 해서 19세기를 넘어 20세기까지 점령한 인물이 되었을까.

거의 모든 국가에서 실패한 사회주의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전염성이 강한 이념도 역사상 드물다.

중국과 북한은 각각 공산당과 노동당을 유지하고 있고, 일본에도 공산당이 남아 있다.

아직 유럽에서는 사회 민주당이 매우 중요한 진보 정당이다.

일부 학자들은 말한다.

정치인인 레닌과 스탈린이 사회주의 정책에 실패한 것이지, 마르크스의 이론적 사회주의는 망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무산자의 혁명을 주장했던 마르크스는 사실 유산 계급 출신이었다.

그것도 유대계 독일인 변호사의 아들이었고, 외가 친척은 전기 회사 필립스 설립자였다.

마르크스를 사회주의 사상의 길로 이끈 인물은 훗날 장인이 되는 ‘루트비히 폰 베스트 팔렌’이라는 프로이센 귀족이었다.

그는 마르크스의 아버지 ‘하인리히(Heinrich Marx)’와 친하게 지내며 친구의 아들에게 프랑스와 영국의 자유주의와 이상적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소개했다.

막연히 문학과 고전을 사랑했던 소년은 진보적 귀족의 서재를 드나들며 반체제 사상을 지닌 학생으로 자라났다.

요즘 말로 ‘강남 좌파’라고 할 수도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르크스는 더욱 급진적인 길로 나섰다.

유산 계급의 삶이 아니라 혁명 지식인으로 성장하길 추구했다.

대표적인 전환이 법학을 포기하고 철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이다.

군주제 비판자라는 위험한 낙인도 받게 됐다.

무신론자에다 왕정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었던 마르크스는 좌파적 관점에서 사회를 비판하는 청년들과 어울리면서 이른바 ‘강남 좌파’가 주장한 계급론 학생운동권이었다.

프로이센 정부는 이들을 매우 불순한 반동으로 분류했고, 사회에서 자리 잡지 못하게 박해했다.

이때 보안 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갔던 마르크스는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도 강사 자리 하나 얻지 못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진보 언론 활동이었다.

<라인 신문> 편집장으로 취임해 매체에서 독일 정치와 관련된 신랄한 비판을 담은 칼럼과 기사를 쓰며 지식 도매상 길을 걸었다.

그러다 운명처럼 만난 대상이 바로 ‘노동자’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헤겔과 피히테 같은 사상가들은 역사를 진보시키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주목했다.

하지만 자유의지로 세상을 바꿀 만큼의 능력과 영향력을 지닌 사람은 많지 않는 것이 현실이였지만, 무산계급인 노동자들을 핵심 주체로 끝까지 믿음을 밀고 갔다.

필자가 거주하는 충주시는 지속 가능한 ‘문화관광 도시’로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고 있다.

시민 누구나 즐기고 체감할 수 있는 ‘건강하고 문화적인 도시 충주’로 만들기 위해 충주문화관광재단은 ‘누구나 함께’라는 전략을 통해 다양한 주요 정책 사업에 대해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문화 다양성으로 품격 있는 문화 도시로서의 좋은 이미지를 알리고 경제 활성화의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낼지 주목된다.

문화관광을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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