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 증평문인협회·수필가

[동양일보]하늘은 잿빛이다. 지금 나는 짙은 가을 한가운데 있다.

떨리는 감나무잎은 소슬바람에 휩쓸린지 오래. 서리 맞은 까치밥 한 알. 익을대로 무르익었다.

깜빡이는 비상등을 켜고 날아오르는 반딧불이 쫓으며 과수원 둔덕으로 내달리던 여름밤.

그때 그 시절 이곳의 별은 유난히도 빛났다.

바깥 큰 마당엔 버드나무 두 갈레 번성해 있고 돌계단을 내려오면 어른 키 만 한 담장이 집을 감싸 안고 있다.

장날이면 장꾼들과 소 떼가 담장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줄지어 걸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까치발을 하고 꽃들이 한창인 담장 안을 엿보기도 한다. 담장 바깥쪽엔 감나무가 두 그루 서 있었고 포도나무, 대추나무, 복숭아, 밤나무가 있었다.

물맛 좋기로 소문난 물 펌프장 옆으로 언제나 햇살 부자인 장독대가 있고 하얀 옥양목 앞치마를 두른 엄마가 거기 있었다. 뒤 안으로 돌아가면 아버지가 돼지를 키우는 돼지우리가 있었고 따스한 봄날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들 땜에 마당 가득 기쁨이었다.

손재주 좋은 아버지가 짚으로 만든 개집에는 붉고 짧은 털옷 입은 메리가 살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곳에 섰다.

성산동 721번지. 주인 없는 낯설은 마당에 서서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나는 멀고 먼 아득한 기억의 조각들을 건져 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

반세기를 흘려보낸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잊은건가. 지운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넓은 운동장만큼이나 커 보였던 바깥마당은 헛간으로 변하였고 버드나무 밑에 누워 별을 헤던 아이도 없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사는지 정리되지 않은 농기구들이며 약통, 비닐, 낙엽들로 뒤엉켜 스산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담도 대문도 없는 집에서 연로하신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신다.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을거 같은 곳에서 뜻밖에 사람을 만나니 반가워서 덥석 손을 잡았다.

제가 태어나 살던 곳에 한번 와 보고 싶어서 찾아왔노라고 하니 잡은 손을 놓지 않고 한동안 꼬옥 쥐고 계신다. 자세히 살피시더니 누군지 모르겠다 하신다.

잘 들리지 않으셔서 마치 싸우듯이 큰 소리로 묻고 대답하는 사이 딸이 여덟이었다고, 딸 부자집이었다는 말에 ‘아! 하늘이’ ‘하늘이 딸이냐?’ ‘ 막내딸?’ 하신다.

아버지 성함은 기억을 못하시나 별명을 기억해 주셨다. 그 양반은 법 없이도 사는 사람 이라며 아버지를 ‘하늘이’ ‘하늘이’ 라고 부르시곤 했다면서 지난 세월을 기억해 주신 것도 고마운데 한마디 더 하셨다.

‘딸만 소복이 낳아서 어쩌노’하며 모두 걱정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 요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즈음 이곳에서 산 증인으로부터 듣는 딸 부자집 ‘하늘이’의 이야기에 아버지 어머니의 일대기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주인이 두 번이나 바뀌었고 지금 사시는 분은 비닐하우스를 크게 짓고 참외 농사를 하신다고 했다. 그 긴 세월 동안 변하지 않았을거란 생각은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너무나 변해버린 탓에 마음은 무거웠고 괜히 눈물이 났다.

나는 기억한다. 아련한 마당의 햇빛, 하찮은 돌부리, 잡초까지 어디 하나 기억나지 않는게 없고 눈에 선하다. 깨끗이 쓸어논 마당에 버드나무의 버들씨가 날릴때면 내 마음도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연한 잎새를 비추던 그 초록햇살.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여길 와 보기 전만 해도 나는 손에 잡힐 듯 모든 사계가 내 안에 존재했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할머니께는 샤인머스켓을 선물하고 아쉬운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 아버지 ‘하늘이’를 기억하신 동네 할머니는 아마도 천사 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길 내내 그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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