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묵 시인

최은묵 시인

[동양일보]춘분이 지났다. 한낮은 따스한데 조석으로는 아직 쌀쌀하다. 피부로 느끼는 쌀쌀함이 단지 자연현상 때문만은 아닌 게 생활물가가 부쩍 심란한 까닭도 없지 않다.

요즘 들어 삶의 가장 근본인 의식주가 흔들리는 소식이 잦다. 세계의 시선이 AI 산업에 쏠리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의 서민들은 사과나 대파 등 삶의 일차적인 요소에 심신이 고단하다. 의식주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기본 요소다. 이것은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며 그중 어느 하나라도 결핍이 발생했을 경우 삶의 균형은 무너지게 된다. 이처럼 인간의 삶에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분명 존재한다.

밑바닥 현실이 반영되지 않는 시스템은 공허할 뿐이다. 말뿐인 정책은 국민의 신음을 더욱 깊게 만든다. 육체적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현실에서 여가나 문화생활은 딴 세상 이야기다. 행복을 추구해야 할 삶의 질이 바닥으로 치닫는 것도 모자라 바닥이 무너지고 있다.

거리를 다니다 보면 상가 공실이 자꾸 늘어간다. 사람이 북적여야 할 곳에 임대를 알리는 팻말만 붙어 있다. 자영업이 많은 대한민국에서 소상공업의 붕괴는 방관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스템은 표류하고 언론은 밑바닥의 현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 어느 한 곳의 기울어짐으로 인해 무게중심이 깨졌다면 신속하게 원인을 파악하고 대처해야 하지만 책임 있는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생활물가지수가 연일 치솟는다. 이것을 안정시켜야 하는 건 당연히 정부다. 권력은 국민의 머리 위에서 힘을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대신 일하라고 국민이 맡긴 자리다. 이런 평범한 정의가 변질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발생했는지 역사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책임을 지지 않는 권리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스스로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세력은 국민을 짓누르려 한다.

스프링은 누르면 튀어 오른다. 생활물가는 국민이 견딜 수 있는 마지노선이다. 누구라도 삶의 바닥이 무너지는 현실을 상상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국민은 세금을 내고 국가는 세금으로 나라 살림을 한다. 권리와 의무와 책임은 별개로 작동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예외가 되어선 안 된다. 최근 1만원 사과에 이어 대파 한 단 875원 뉴스가 이슈다. “대파 한 단에 875원이면 합리적인 가격이다”라는 대통령의 발언에 온라인 게시판에는 시민들이 허탈한 목소리가 쌓여간다.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은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등이다. 이 또한 무엇 하나라도 결여된다면 민주주의는 흔들리게 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1조 1항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관념이다. 그것을 위해 대한민국 구성원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권리와 책임을 수행하면 된다. 그런데 ‘나는 인간으로서 존엄한가? 자유로운가? 평등한가?’ 이런 물음이 자꾸 생기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국가 시스템이 위태롭다. 행정부는 잘잘못을 따져 가리는 곳도 아니고 편을 가르는 곳도 아니다. 국민을 대신해서 책임을 지고 일을 하는 곳이다. 국가권력이 어느 하나로 집중되거나 남용하지 않게 입법 사법 행정을 나누는 까닭도 국가 시스템의 조화와 균형 때문이다. 위정자가 국민을 대신해서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한다면 국민은 커다란 근심 없이 각자의 위치에서 삶을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미래의 꿈은 고사하고 현재의 삶이 의식주에 쏠려 있는 현상은 삶의 고단함을 가중시킨다.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생필품의 가격이 사과나 대파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대중교통 가스 전기 등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들이 줄줄이 오르지 않을까 걱정이 많은 요즘, 부디 정부는 특정 계층만을 위한 불균형 정책이 아니라 국민의 근심이 줄고 공감할 수 있는 정책을 실행하길 바란다. 춘분이 지났는데 봄이 아직 먼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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