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포석조명희문학관 문학박사

강찬모 포석조명희문학관 문학박사

[동양일보] 문향, 생거진천을 말할 때 한국근대문학과 디아스포라문학의 선구자인 포석을 필두로 지나칠 수 없는 또 한 사람의 인물이 바로 표암(豹菴) 강세황(1713~1791)이다. 그도 송강처럼 진천에 ‘사거진천(死居鎭川)’으로 와 영면한 인물이다. 그러나 송강과 달리 부모 사후 6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했기 때문에 생전에 진천과 직접적인 인연이 있었다. 강세황은 단원 김홍도의 스승으로 일반에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의 빼어난 화가며 명실상부한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독보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한 절륜한 인물이었다. 그는 기존의 회화(진경, 인물)를 발전시켰으며 특히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서양화 기법을 과감하게 수용해 새로운 차원의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 예원(藝苑)의 총수로서 그의 역할은 시평(詩評)과 화평(畵評)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작품을 보는 심미안은 당대의 기준이 되었으며 작가의 역량을 가늠하는 최고의 감식안이었다. 대표작으로는 「자화상(自畵像)」과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등이 있다.

강세황은 고향인 서울에 살다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이주해 살았다. 이 기간(30년)은 안산이 조선 후기 문화 예술의 부흥기를 이끈 중심 지역이었으며 그 한가운데에 강세황이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가 조선의 4대 장서각 중에 하나인 ‘청문당’ 소유주인 유명천의 ‘손녀사위’라는 점이다. 유명천의 동생인 유명현이 소유했던 또 하나의 장서각인 ‘경성당’도 인근에 있었는데 강세황은 2만여 권이 소장된 두 곳의 장서각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시서화를 연마하며 지역 예술가들과 교류함으로써 삶과 예술의 폭 넓은 안목을 마음껏 키울 수 있었다. 지식과 정보의 창고였던 만권루가 없어 경향으로 번거로운 출타를 해야 했던 시대에 그에게 ‘이만권루’에 쌓인 ‘책더미’는 고금의 인문적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는 값진 충일(充溢)의 시간이었다.

강세황이 이주한 안산은 강화학파의 시조인 정제두(1649~1736)가 강화로 가기 전 20여 년 동안 ‘양명학’을 공부한 터전으로 실용적 학문과 진보적 사상이 함께 번성하던 문화 생동의 ‘핫 풀레이스(hot place)’였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강세황에게 진천이 ‘사거(死居)’가 아니라 ‘생거(生居)’였다면 아마도 ‘완위각’에서 학문과 예술의 세계를 천착했을 것이라는 상상 말이다. 물론 시묘살이를 통해 진천과 인연을 맺었지만 불효에 대한 속죄의 의미가 큰 시묘살이는 산소에 구속될 수밖에 없는 특수한 상황으로 본격적인 정주의 삶과는 다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눈여겨 볼 대목은 시묘살이 기간(1734, 21세~1738, 25세)에도 부모와 조상이 잠든 ‘문백’과 반대 방향에 있던 ‘초평’에서는 여전히 완위각이 조선의 명사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사실로 단정할 수 없지만 당시 4대 장서각 중 2곳의 장서각과 특별한(인척) 관계를 맺고 있던 강세황이 완위각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가 완위각을 한 번쯤 들렀다고 상상해 보는 것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참새와 그것처럼, 선비가 어떻게 문방사우(文房四友)를 지나칠 수 있을까.

강세황이 시묘살이할 무렵에는 완위각의 주인인 이하곤이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기 때문에 그와 대면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이하곤과 막역한 우정을 나누었던 겸재 정선(1676~1759)이 여전히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던 때였다. 존경과 극복의 대상인 선배 정선과 윤두서(1668~1715)가 제 집처럼 드나들며 삶을 이야기 하고 예술로 주야를 밝혔을 완위각은 강세황에게 그 자체로 흠모와 함께 묘한 호승심이 발동하는 동기부여의 현장이 되기에 충분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또한 서예의 대가 백하(白下) 윤손(1680~1741)과 그의 제자 이광사(1705~1770)가 방문하여 써 걸은 완위각과 만권루의 현판은 이곳이 시서화 문사철로 상징되는 인문적 본향임을 실증하는 것으로 강세황에게 완위각은 여러모로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이하곤은 시서에도 능했지만 무엇보다 뛰어난 ‘화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기 중에서 윤두서와 정선을 평생 가까이 두고 사귈 수 있었으며 완위각에는 고금의 희귀하고 첨단의 그림 이론에 관한 책들이 또한 즐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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