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영 자 수필가

요 며칠 자꾸만 ‘방카’를 밀고 가던 깡마르고 작은 체구의 부자(父子)가 떠오른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작은 얼굴,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듯 힘없고 가난해 보이던 아버지와 아들이 삶의 현장에서 밥을 벌기위해 안간힘을 다하던 모습 때문이다. 삶은 하늘 아래 어느 곳에서도 녹록치 않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각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지인들 몇이서 의기투합하여 필리핀으로 여행을 떠났다. 패키지로 가는 3박 4일의 짧은 일정이기에 많은 곳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감동은 컸다. 마닐라에 머물며 하루에 한두 곳만 다녀오는 여유로운 여행이었다. 대부분의 여행이 새벽밥 먹고 뛸 정도로 시간에 쫓기 듯 숨 가쁘게 다녔었는데, 이번에는 여유롭게 시간이 남아도니 여행사가 무성의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는데 알고 보니 그 나라 국민성이 한없이 여유롭고 낙천적인데 기인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머리에 깊이 각인 된 것은 팍상한폭포와 따가이따이 화산 관광이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팍상한폭포는 세계7대 절경의 하나로 필리핀을 대표하는 관광지다. 동서냉전시절에 베트남전쟁을 주제로 한 영화 지옥의 묵시록, 플레툰, 여명의 눈동자등의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마닐라 동남쪽 150km지점에 막다피오강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열악한 도로사정으로 그 곳까지 가는데 만 약 2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팍상한 계곡은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스페인 식민통치 시대에 선교사들이 현지인들이 치성을 드리던 폭포를 찾아가면서 아름다운 폭포가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폭포를 만나기 위해서는 카누를 타고 계곡을 역류하여 강 상류로 올라가야한다. 강기슭을 따라 카누를 탈수 있는 리조트들이 늘어서 있다. 식사와 숙박, 카누 대여 등 관광객들이 여행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다. 관광객들은 구명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방카’라고 부르는 좁은 나무배에 2, 3명 씩 타면 배의 앞 뒤 쪽에 한 사람씩 두 명이 노를 젓는다.

카누를 모는 사공들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로 관광객들의 숫자에 따라 순번을 정하고 그 순번이 돌아왔을 때에 카누를 운전한다. 사공 상호간에 호흡을 맞추는 일이 중요하므로 부자지간, 형제지간 또는 친한 친구 등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끼리 한조를 이루어 카누를 운전한다. 1000여명이 활동한다니 순번이 돌아오지 않을 때는 대부분 농업에 종사 한단다.

강의 하류는 물의 흐름이 완만하고 강폭도 넓어서 모터보트가 손님을 실은 여러 대의 카누를 이끌고 간다. 상류로 갈수록 물살이 거칠어져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공들이 노 젓기가 힘들다. 바위들이 앞을 가로 막는 협곡에서 노를 저을 수 없어 배에서 내려 바위를 맨발로 밀며 앞으로 나간다. 배에서 내렸다 뛰어 올랐다를 반복하니 거친 바위에 맨발이 상처라도 날까, 한 잎 나뭇잎 같은 작은 배가 뒤집히기라도 할까 가슴이 조마조마한 채 1시간여를 오른다. 팍상한 폭포에서는 뗏목을 타고 낙차가 40m라는 폭포 속으로 들어가 물을 맞고 나오는 스릴 만점의 아슬아슬한 순간도 체험 한다. 다시 1시간여를 내려오는 동안 사공들은 “힘들어” “배고파” 같은 한국말을 배워 심중을 토로 하며 팁을 요구한다. 우선은 그들의 배를 모는 기술과 솜씨에 놀랐다. 어려서부터 단련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 낼 수 없는 중노동이다.

짧은 영어 실력으로 그들과 얘기를 나누고 보니 앞에서 이끌고 가는 젊은이가 아들이고, 25살이며 7남매의 맏이란다. 결혼하여 두 살짜리 젖먹이가 있고 가난하여 살아가기 힘들다고 호소한다. 편하게 카누에 앉아있는 내가 몸이 따가울 정도로 미안하고 불쌍하고, 고맙다.

일 년 내내 여름만 계속되어 4모작이 가능하다는데도 노는 땅이 많고, 그들은 국민소득 1000달러의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1960년대 초반 우리의 국민소득은 100달러, 필리핀은 300달러로 우리 국민소득의 3배였다. 일본에 버금가는 부자나라였다. 그러나 1986년 마르코스가 추방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20년의 장기 독재와 경제정책의 실패가 남긴 유산이다. 이멜다의 구두가 생각났다. 수천켤레의 구두를 자랑했다는 사치스러운 퍼스트레이디 말이다.

팍상한폭포에서 물을 맞고 흠뻑 젖은 채 내려오면서 나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는 말이 자꾸만 되뇌어 졌다. 한나라의 흥망이 지도자의 역할에 따라 좌지우지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12월 19일, 대한민국을 이끌고 갈 선장을 뽑는 날, 우리는 눈과 귀를 한껏 열고 마음을 다잡고, 정성을 다하여 투표장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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