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사 김규식(尤史 金奎植)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학자이며 정치가이다.

1922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1945년 말에는 임시정부 일진으로 귀국하여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좌우가 극한 대결을 벌였던 미군정 시기인 1946년 여름에서 1947년 말까지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였고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과 민족자주연맹의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는 백범 김구와 함께 평양 남북연석회의 참가하는 등 통일노력을 하였는데 19506.25남침전쟁 발발 후 납북되어 동년 1210일 평북 만포 북한군 병원에서 별세하였다.

우사 김규식은 1946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되면서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

미소공위 휴회 이후 좌우 양 진영으로 나뉘어 첨예한 갈등과 대립을 반복하는 상황에서 좌우합작을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익진영은 자율정부 수립이라는 명분으로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맞서 좌익진영은 총력을 기울여 미소공위 재개운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좌우 양 진영이 정략적으로 별도의 운동을 벌여나가는 상황에서 우사 김규식은 좌우가 반목만 할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합의를 이루어 미소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이의 추진에 적극 나섰다.

일차적으로 합의가 가능한 중도세력이 뭉치고 이를 주축으로 양 진영의 합작을 도모하는 좌우합작운동에 나선 것인데, 이러한 우사의 노선에 미군정도 동의를 표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이념을 초월하여 좌우가 합작해야 한다는 우사 김규식의 생각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며 동참한 정치지도자는 조선인민당의 당수인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인민공화국을 선포한 바 있었지만, 극좌노선과는 거리를 두었던 몽양 여운형 역시 미소공위를 통한 정부수립만이 한반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좌우가 힘을 합쳐 미소공위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처럼 우사나 몽양의 좌우합작운동은 한반도의 분열을 막고 민족의 단합을 위해 노력한 민족평화 자주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남북분단의 상황하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힘의 논리라는 국제정세가 남북한을 가릴것 없이 우리민족 전체에게 매우 절박하리만큼 대단히 위험한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북한주민을 외면하고 장거리 로케트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 북한 당국의 전술은 무엇인지 그 속셈을 간파하는 것도 필요하고 이에 대응하는 안보전략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기소르망은 중국과 북한에 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피력했다.

중국은 두 가지 이유로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는 북한이란 존재가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국제정세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는 것이다.

통일된 한반도는 중국에 군사적으로 매우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다. 중국의 체제 변화가 없는 한 중국의 대북정책이 변화하길 기대하는 건 힘들다고 피력했다.

어떻게 하든 북한 체제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결국 북한 체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건 중국 체제의 변화뿐이라고 본다.

하지만 한국이 적어도 대화와 협력의 대북 노선을 펴면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한국이 북한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고 대화가 단절되고 화해협력이 중단되면 안된다.

또한 미국·일본과 군사협력을 강화해 도발을 억제하는 한편 동시에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 북한과의 민족화해 협력을 더욱 강화하여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우사 김규식의 민족통일을 위한 좌우 합작정신과 통일이념의 계승이 필요한 시점이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