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순 (문학평론가)

 어느 주말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갔다. 그가 새로 근무하고 있는 직장이 궁금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서울 바람도 쐴 겸 나선 길이었다. 그를 만나면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하고 무슨 얘기든 잘 통한다.
 친구는 외교관으로 정년퇴임을 한 뒤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다시 직장을 잡아 일하고 있는데 화가이기도 하다. 밴쿠버에 살던 시절 그를 알게 되었고 밴쿠버에서도 외교관 일을 하면서 개인전을 몇 차례 열기도 했다. 나무를 주제로 지금껏 작품 활동을 해 오고 있고 밴쿠버에서 첫 전시회를 할 때 그의 작품에 반해 그림 두점을 산 적이 있다.
 밴쿠버에 사는 내내 거실에 걸어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한참씩 바로보곤 했는데 그럴 때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온 집안에 화기가 돌고 맑은 기운이 감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글이 곧 사람이라고 하듯이 그림도 그러하리라 믿는다. 작가의 성정이나 내면이 작품에 반영되는 건 다른 예술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성격이 부드럽고 온후하기 그지없는 그는 상대방을 더할 나위 없이 편하게 해 준다.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하고 누군가 그에게 도움을 청하면 온 마음을 다해 돕는다. 그래서 그의 주위에는 항상 이런저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요즘 세상에 그와 같은 사람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그를 만나면 다른 사람에게서 좀처럼 들을 수 없는 특이하고도 다양한 얘기를 많이 듣게 된다.
 새로 옮긴 그의 직장은 도심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무실 창이 숲을 향해 있고 너무도 조용해 마치 절간 같았다. 서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한적한 시골에 와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차를 마시고 한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뒤 그가 김환기 미술관에 가자는 제안을 했다. 김환기 화백이라면 이름은 많이 들은 바는 있지만 그의 작품을 볼 기회는 없었다. 차를 타고 이동해 그를 따라 성북동에 있는 미술관에 들어섰다.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고 시대별로 그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층 한층 올라갈수록 대작들이 나타났는데 추상화로 된 그의 대작들을 보자 압도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이 쏟아져 나와 보는 이를 압도하게 만드는 그의 작품은 그림에 문외한인 나를 감동의 소용돌이에 빠뜨렸다. 지금껏 나름대로 그림 감상을 해왔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가슴이 뭉클했다. 과연 대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큐레이터에게 이것저것 묻고 기념품으로 김환기 화백과 그의 부인 김향안 여사의 에세이집을 샀다. 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글들을 읽어보니 예사로운 글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술관을 나와 친구와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그곳도 마침 갤러리를 겸한 식당이었다. 한적하고 깔끔하게 단장된 그곳에는 봄을 맞아 동호인들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림을 둘러보며 식당 주인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식당을 운영하면서도 예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주인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미술관에서 받은 감동에 힘입어 나는 그림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서점에 들러 관련서적을 사오고 틈나는 대로 읽고 있다. 집 부근에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읽기도 한다. 때마침 우리지역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미술관련 강좌를 개설했기에 두 강좌를 신청해 듣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간 미술에 재능이 없다는 핑계로 건성으로 작품을 대한 감이 있는데 앞으로는 제대로 알고 작품을 대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오십 중반을 넘긴 나이에 내가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치도 못했다. 캐나다에서 들어와 사회복지를 공부한 뒤 그 다음엔 심리학 공부를 해 볼까 고심하던 참이었는데 우연히 친구를 따라 미술관에 간 것이 나를 바꿔놓은 것이다. 앞으로는 틈나는 대로 갤러리나 미술관 투어를 다닐 생각이다. 우선 서울에 있는 갤러리를 섭렵하고 차차 전국의 갤러리를 돌아보고 싶다. ‘아는 자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 즐기는 자만 못하다’라는 공자의 말이 있듯이 하나하나 단계를 높여 즐기는 자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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