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여성백일장 시·수필 부문 20명 수상

여백문학회(회장 김용례)가 주최하고 동양일보와 뒷목문학회가 후원한 2013여성백일장이 11일 청주 3.1공원에서 열렸다. 이날 백일장에는 모두 73명이 참가했으며 20명이 수상의 기쁨을 안았다. 동양일보는 시·수필부문 수상작과 수상자 인터뷰를 싣는다. ▶관련기사 18면 <편집자>

 

 

■ 시부문 장원 ‘눈물’ 쓴 이진숙씨

시 습작을 시작한지 두 달. 이제 막 시에 관심을 갖게 되는 시기에 이진숙(35·청주시 흥덕구 산남동·☏010-2964-8854)씨가 2013 여성백일장에서 시 ‘눈물’로 장원 수상자에 이름을 올렸다.

“이제 막 시가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정말 큰 상을 받게 돼 부끄럽기도 하고 기쁜 마음에 가습이 벅차오릅니다. 무엇보다 저와 가장 가까운 아버지의 눈물을 소재로 상을 받게 돼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솔직하게 쓴 것이 좋은 평가를 받은 거 같습니다.”

이씨는 시 ‘눈물’을 통해 늦장마에 늙은 개미같은 아버지의 애환과 혼자된 언니가 돌아온 상황에서 가정의 슬픈 이야기가 잘 표현된 작품으로, 주제를 이끌어 가는 힘이 살아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평범한 가정에서 순탄하게 자란 서른다섯인 제게 아직 ‘눈물’의 경험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아버지의 눈물이 마음에 와 닿아 글을 쓰게 됐습니다.”

세 명의 자녀를 키우는 그는 늘 바쁘다. 두꺼비생태공원에서 1인1책 강의를 들은 것도 아이들의 독서지도에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글을 쓰겠다는 자신의 꿈도 키우기로 했다. 이번 충북여성백일장 시 부문 대상 수상을 계기로 말이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로 아이들 양육 때문에 솔직히 마음먹은 만큼 열심히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시를 통해 ‘충북여성백일장’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니 지금보다 더 열심히 쓰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박씨는 글쓰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진 마음’이라고 강조한다. “글을 쓰는데 있어 가장 염두 해야 할 것이 ‘어진마음’과 ‘착한마음’”이라고 늘 말하시던 스승의 가르침 덕분이다.

그는 1979년 세종시 출생으로 대전보건대 치기공학과를 졸업했다. 가족으로는 치기공사인 남편 박상현(38)씨와 2남1녀.

 

 

눈물

 

기나긴 여름 장마

헌우비에 코빠진 우산 주서 들고

긴 장화 신으신 아부지가

논둑 트러 가신다

 

그 해 태풍은

다섯마지기가 볏논을 엎치고

처마 밑 고무목간통을

몇번이나 넘쳐서야 끝이 나고

뙤약볕 벼 세우기가 시작되었다

 

늙고 큰 검은 개미마냥

쉴 틈이 없다

 

뒷 마당에 떨어진 돌배는

바가지에 가득하고

퍼런 감이 가지채

장독 앞에 널브러져 있던 날

 

혼자 된 언니가

큰 가방에 독기만 들고

우리집 철대문을 넘어왔다

 

검게 그을린 두 손

참 보람도 없이…

 

대청마루 낮상에는

퍼런 고추가 된장 옆이고

언니는 건넛방에서

 

 

그 날따라

전국노래자랑이 흥이 나지 않는지

아부지가 일찌감치 목침에 누우셨다

 

독수리 오형제에 대장이신

우리 아부지가

할매 할배 상을 치르고도

그 큰 눈에 눈물만 그렁하셨는데

오늘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신다

 

 

인생이란 고개, 힘들어도 고개 숙이지 않으리

 

 

■ 수필부문 장원 ‘고개를 넘으며’ 쓴 임명숙씨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수필. 자신 혹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소재가 될 수 있는 탓에 많은 작가지망생들이 쉽게 접근하면서도 그 솔직함이 두려워 깊이 다가가지 못한다. 그래서 수필은 생각보다 쓰기 어려운 문학이다.

이번 백일장 장원 수상자인 임명숙(41·청주시 흥덕구 복대1동·☏010-8454-0503)씨는 자신의 아픔을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 ‘고개를 넘으며’로 충북여성백일장 수필 부문 대상을 거머줬다.

“아직도 제가 장원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아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큰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속내를 드러내는 일이 제겐 참 어려운 일이었는데 수필을 쓰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어 좋습니다.”

수필 ‘고개를 넘으며’는 마흔 해를 살아오면서 대학 불합격과 어머니의 부음, 아버지의 재혼 등 세 번의 인생 고개를 넘으며, 그 아픔의 고개 또한 겸허히 받아드리고 살아야겠다고 깨닫는 자신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렸다. 주제를 요소요소 들어내며 짜임새 있고 문맥이 매끄러우며 띄어쓰기와 맞춤법 등 문장의 기본기도 탄탄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늘 밝고 그늘 없는 외모 덕분에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를 곱게 자란 외동딸쯤으로 생각했다. 때문에 자신이 대학에 불합격 했던 것도, 어머니의 죽음으로 아버지가 재혼한 것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숨기려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그의 속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로 했다. 수필을 통해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글쓰기를 유난히 좋아했던 임씨가 이번 백일장에 참가하게 된 것은 수필가인 김용례 청주시립서부도서관 1인1책 강사 덕분이었다. 김용례 수필가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대회 참가를 권유한 것.

“김 선생님이 여성백일장에 한 번 도전해 보라는 말씀에 용기를 얻어 대회에 나가게 됐어요. 가장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참가했는데 ‘고개를 넘으며’라는 글제를 보는 순간, 제 지난날을 고백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수필을 쓰기 시작한지 1년, 글은 아내와 어머니의 이름이 아닌 오롯이 자신과 세상과의 소통창구였다.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다.

“‘충북여성백일장’수상으로 용기를 얻었으니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할 생각입니다. 감동적인 글을 열심히 쓰는 수필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임씨는 1973년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포천고와 서원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가족으로는 회사원인 남편 이경수(43)씨와 1남1녀.

<김재옥>


 

 

 

고개를 넘으며

임명숙

인생이란 무엇일까? 사람이 살아 있다는 단순한 어원을 들여다보니 수많은 고개의 연속이 바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일 아침 동트는 햇살을 보며 따사로운 24시간이 포장된 선물처럼 가슴 설레는 긴장을 준다. 물론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크고 작은 고개들이 얼굴을 내밀기는 하지만 아침마다 새로운 기대를 해본다.

내가 10대일 때는 인터넷이 사용되지 않던 시대라 대학 합격자 발표를 전화로 확인했다. 상대편 수화기에서 합격자명단에 없다는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안정권이라 확신했던 나는 장학생 명단을 다시 확인해 달라며 당당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거기에도 없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내 인생의 첫 번째 고개가 시작되었다. 큰 어려움 없이 성장기를 보냈고 언니 오빠들도 무난히 입학했기에 나도 그렇게 되는 줄 알았지만 한 뱃속 운명도 다르다는 걸 알았다.

처음으로 자살하는 사람들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창피함에 휩싸여 매일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대학에 가야 한다는 선생님 권유로 어렵게 마음잡고 도서관을 찾았다.

두꺼운 얼음 속에 사는 물고기들도 가족의 몸을 서로 보듬어 주어야 할 만큼 추웠던 그 겨울이었다. 조용한 도서관에 나를 부르는 동네 아주머니의 외침이 들렸다. 모두들 수군거리며 부끄러워하는 내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창피해하며 아주머니를 따라 나왔더니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면서 병원에 가자는 것이다. 난 무덤덤하게 아주머니를 따라 갔다. 그러나 뜻밖에도 택시가 도착한 곳은 영안실이었고 그 안에는 어느새 준비된 엄마의 영정사진이 있었다. 막내로 태어나 엄마의 무한한 사랑을 받아 온 나는 결국 인생의 커다란 고개 앞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영안실과 병실을 오가며 주사 기운에 몸을 추스르고 스무살 첫날 엄마와의 차디찬 이별을 했다.

대학 떨어진 슬픔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아픔, 심장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쓰라린 상처는 곪아갔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은 육체적 허기도 느낄 수 없었고 꿈과 미래도 슬픔과 함께 묻어야 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에는 없던 고개들이 마치 스무 고개 놀이하듯 하나 둘씩 나타나 나를 철들게 한다. 엄마라는 힘든 고개를 넘고 보니 그동안 마음을 나누지 못했던 아버지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언제나 강인한 모습으로 어렵게만 느껴졌던 아버지는 더 나약한 존재였다. 어찌보면 엄마 없이 할 수 없는 일이 나보다 더 많은 분이었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 같다

그렇게 아버지와 의지하며 고개를 넘었다. 함께 농사일을 도우며 팔이 아파 밤새 울었고 손톱 밑에 낀 때를 보며 내 신세가 처량해 울었다. 그러나 더 힘든 것은 새엄마를 맞이하는 일이었다. ‘열 효자 보다 악처 하나가 낫다’라는 말이 있듯이 주변 친척 분들은 아버지의 재혼을 서두르셨다.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던 나는 아버지의 맞선보는 자리에 동행을 하며 눈물을 쓸어 내렸다. 그렇게 시작된 새 식구와 가족이 된다는 것은 엄마 잃은 슬픔과 다른 아픔으로 내게 찾아왔다.

그러나 정말 시간은 묘약이다. 불혹이라는 고개를 어렵게 넘고 보니 그동안의 수많은 아픔은 나를 단련시키기 위한 하나의 과정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하나의 고개를 넘을 때마다 겸손함을 주셨고 이해를 하게 하셨다. 인생의 절정인 40대의 정상에서 앞으로 다가올 어려움들도 고개 넘듯이 겸허히 받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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