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주 희(침례신학대 교수)

중국, 작가 조정래의 성실한 촉수가 중국으로 향했다. 이미 [태백산맥]과 [한강] [아리랑]등에서 우리 현대사를 소설로 정리해 낸 작가. 글 쓰는 동안 스스로 유폐한 소설 공방, 서재를 [황홀한 글 감옥]이라는 부르며 기꺼워 한 작가. 글 쓴 원고지를 눕혀 쌓으면 자기 키를 훨씬 넘고도 남아 한참 전 저작등신(책이나 작품이 자기 키에 도달하는 것)을 이미 이룬 작가 조정래.  태백산맥을 읽기 전과 후로 시각이 바뀌었다고 독자들이 고백하게 한 작가.

 이 작가가 [정글만리]라는 제목으로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세권 써냈다. 공산주의를 표방한 소련은 몰락했는데 중국은 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고, 중국을 무대로 새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일었다고 한다.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시장이 된 중국 급부상을 수천 년 동안 국경 맞대온 우리 한반도와 직결된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를 집어 삼키며 세계 중심이 된 나라, 수천 년 국경 맞대고 살아온 우리는 적인가 친구인가를 소설적 방식으로 짚어본 것이다. 적이라면 지피지기가 중요하고, 친구라면 우정 가꿔가기가 중요할 것이다.

 하여 소설 속 무대는 중국, 중국인, 중국문화, 중국 현실이다. 대한민국에서 중국에 상사원으로 가 있는 ‘전재광’을 중심으로 중국 역사나 현재 풍경들이 소개되고 사건이 전개된다. 역사나 일화에서  비롯된 속담이나 단어들, 이미 일본을 제치고 G2에 당도했고 곧 G1이 될 위력들은 서술자의 시선과 해설에 따라 거대중국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다. 중국이 기원후 1800년 동안 GDP 세계 1위였다는 그런 사실들을 새삼 상기하게 하는 식으로.

 이 소설은 급속히 경제 성장을 이룩해낸 나라의 성장통을 다룬다고 볼 만한데 유치와 성숙, 보존과 탈피, 의식과 행동이 일관되지 않는 게 성장기 특성이라면 중국은 지금 그 시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만만디, 결정과 행동을 미루어 천천히 처리하는 듯 보이지만 자기 이해와 관계된 일은 후딱 해치우는 신속함. 돈과 마오쩌뚱을 두 개의 신으로 섬긴다는 국가, 사람 사이의 관계인 ‘꽌시’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작용하는 일처리 방식, 공무원이 뇌물을 받지 않으면 무능하게 보이기까지 한다는 공직자의 세계. 전 세계 가장 막강한 짝퉁 상품 제조국이지만 정부가 처벌을 넘어 두둔해대더니 지금은 전 세계 고가품 소비 대국이 되어버린 변화들까지 정치, 경제, 문화들을 종횡으로 넘나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중국인들이 오늘을 이루어내는 동안 겪은 삶의 애환과 고달픔도 우리의 경험과 다를 게 무어랴”는 작가의 말은 거대 중국은 변화 와중이니 지금 보는 모습들로 판정해 버릴 것 없다는 거시안목의 제시와 연관지을 수 있다. 중국이 수천년 동안 차지하려고 애썼지만 실패한 두 나라가 한국과 베트남이고, 중국을 대국으로 인정하고 서로 사이좋게 살며 특산물을 교역하자고 해서 만든 제도가 조공인데, 한국은 자치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면서 살았고 중국의 식민이 된 적이 없다는 말로 속국이라는 표현이 잘못 되었다는 소설 속 언급은 중국에 대한 우리의 콤플렉스나 경제민주화를 먼저 이루었다는 얍실한 군림의 무위를 지적한다고도 하겠다. 중국의 어마장창함도 사실이고, 그 곁에서 압도당해 망하지 않고 나름의 규모를 유지하며 살아온 과거도 사실이기 때문. 가난하면 옳고 부자면 나쁘다고 보아서 안되듯, 규모가 크다고 나쁘고 작다고 바르다고 볼 수 없는 것,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은 크기의 차원이 아니라 가치의 차원이므로.  

 


 이 소설은 기존 소설과 다른 독법이 필요할 수 있다. 사건의 추이보다 독자를 계몽하고 싶어하는 서술자의 의도를 따르며 느긋하게 읽어야 더 얻을 것이 많다.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연인들이 부모 반대를 넘고 결혼하듯 중국과 한국은 혼인하는 남녀같은 가까운 사이가 될 것인가, 어려운 사돈의 관계가 될 것인가. 중국은 스스로들도 낯설어하고, 타국도 낯선 성장통의 시기, 격변의 한 때를 지나는 중이고, 우리가 한 번에 조감할 수 없는 여러 층의 문화와 역사가 겹쳐있으며, 그 안에 귀한 자원이 무진장한 만리나 되는 정글인 옆 나라. 신산한 정글을 신비, 신기, 신선하게 헤쳐가자면 반응을 넘는 대응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면 작가의 소설적 계몽은 일부 달성되어가는 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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