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수 길(논설위원, 소설가)

 음력 세밑이다. 떡국에 얹어먹는 나이가 새삼스러워지는 때다. 의식주여건이 좋아지고 발달된 의학덕분에 인간수명이 길어지고 있다. 출생을 축하하는 백일 돌잔치는 여전하지만, 장수를 축하하는 환갑잔치는 점차 그 모습을 감추고 있다. 자식들이 불효해서가 아니라 환갑 맞는 본인들이 손사래를 치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이 60이면 뒷짐 지고 지팡이 짚고 허리 꼬부리고 다니며 상노인 행세하던 건 옛말이 됐으니. 환갑이라고 섣불리 잔치벌이다가는 장수축하는커녕, 땡감이 홍시행세 한다고 코웃음 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요즘 60대는 경로당에 발도 들여놓지 못할 미성년자 취급이고, 70대도 8,90대 노인들 물심부름이나 할 처지다. 늘어난 수명만큼 어르신 대접도 유예되고 이승 하직시기도 유예된 셈이다. 자식들 생각은 둘째로 치더라도, 수명연장의 혜택을 누리게 된 당사자들도 기뻐할 일인지 미안해할 일인지 판단이 난감한 일이다.

 1930년 당시, 우리나라 여성 평균수명은 35,1세, 1960년에는 53,7세였단다. 2013년 유엔인구기금이 발표한 ‘세계인구현황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기대수명은 85세. 세계3위란다. 불과 50여년 사이에 수명이 엿가락처럼 늘어난 것이다. 일하는 중 장년 보다 힘 못 쓰는 노인들이 많은 노령사회, 젊은 자식들은 일자리 찾아 떠나고 늙은 자식이 늙은 부모 봉양하는 초고령사회 도래가 남의 일이 아니게 됐다.    

  머리털 허연 친구들 다섯이 가끔 잔디밭에 나간다. 달걀만한 공을 아무리 힘껏 때려 봤자 180M도 못나간다. 제멋대로 익힌 솜씨들이라 그러려니 하면서도, 앞선 팀에서 때린 공이 창공에 긴 포물선을 그리며 시원스레 날아가는 걸 보면, 탄성과 탄식이 절로 나온다. 탄성은 앞 팀에 대한 부러움이요, 탄식은 내가 때린 공의 짧은 비거리에 대한 불만의 표시다.

 우리가 꾸물댄 탓인지, 홀을 떠나기 전에 뒷 팀이 와서 대기하는 상황이 됐다. 친구의 티샷을 보고 있던 중년이 ‘실례지만 어르신들 연세가 몇이시냐’고 물었다. 허옇게 바랜 데다 그나마 빈 곳이 많아 허전한 머리를 이고, 오지 않을 곳에 온 것 같아 모두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이실직고를 해버렸다. ‘일흔 다섯.’ 물어 온 중년이 ‘대단들 하십니다.’ 놀라운 표정을 짓는데, 내가 토를 달았다. ‘나는 예순 다섯이요.’ 중년은 ‘에이,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내 말이 가당찮다는 듯 웃었다. 애초부터 웃자고 한 말이었지만, 중년의 반응은 나를 무색하게 했다. 거짓으로라도 내 나이 60대로 되돌리긴 틀려먹은, 썩은 인생이구나....

 퇴직 후, 소일 겸 건강 생각해서 산악회를 따라다녔다. 초기엔 4시간 내외의 코스를 40여 명 동행들 대부분이 완주했는데, 10여 년 지나는 사이에 완주인원이 점점 줄어들었다. 지금은 절반쯤만 완주고, 나머지는 중턱에서 회귀다. 그러면서 자위삼아 하는 말들이 걸작이다. ‘우리 나이가 몇인데..., ’ 동행중에는 80대도 서너 분, 60대도 십여 명이 있지만, 대부분 70대들이다. 남들 앞에서는 아닌 척 해도 먹은 나이는 스스로도 속일 수 없는가보다.

 국립생태원장 최재천 씨가 모 일간지 칼럼에서, 수명이 늘어난 것만큼 더 사는 건 ‘어차피 개평인생’인데, ‘옛날 같으면 모두 관 속에 누워 있을 사람들이 허구한날 쌈박질이나 하고 있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꼴불견이다’라고 했다. 그 말이 내 가슴을 쿡 찔렀다.

 


 그 즈음, 나는 한참 나이 어린 젊은 사람과 다투다가 상대방에게 고함을 버럭버럭 질렀었다. 귀가해서 아내가 말했다. 고함치는 내 모습이 되게 흉해 보이더라고, 그러니 없었던 일로 치고 잊어버리라고, 내려놓으라고.... 그런 아내에게까지 ‘삐뚤어진 맘보를 고쳐놔야 한다’고 화를 냈었다. 그러다 며칠 지나고나니 웬만큼 화도 풀리는 참이었는데, 최재천 씨의 ‘꼴불견’론이 비수처럼 가슴을 푹 찌른 것이다. 그래, 아내의 말대로 내려놓자. 더 흉한 꼴불견 인생 되기 전에.... 정작 내려놓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그도 오죽했으면 그랬겠는가...... 

 나이 먹는 것이 어차피 자랑은 못 되는 일이다. 개평으로나마 오래 사는 덕을 ‘꼴불견’으로 값을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가슴에 들어찬 욕심, 미움, 분노, 다 내려놓고 마음 비우는 게 쉽지 않다. 용서, 사랑, 자비, 그런 걸로 가슴을 채워야 한다는데, 이미 채워진 것을 버리지 못하니 새 것이 들어갈 틈이 없어서인가. 번번이 꼴불견 노릇을 하고 난 뒤에서야 가슴을 치는 일이 줄지 않는다. 생각노니 속물 소인배근성이 몸에 밴 탓이려니.... 비노니 어차피 개평으로 누리는 삶,  꼴불견인생은 되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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