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순(문학평론가)

 어제가 시아버님 열 다섯 번째 기일이었다. 요즘 세상에는 기일의 의미가 많이 변질돼 예전의 제사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나름대로 편리하게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집은 여전히 내가 시집오면서부터 지내오던 제사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어느새 결혼한 지 삼십 년이 넘었는데 젊은 시절엔 겉으로 표시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불만이 많았다. 철저히 유교식을 고집하는 가풍이나 제사방식이 무척 고루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철저히 서구식 교육을 받고 자유스러운 집안에서 살다 결혼하고 보니 대종가 외며느리로서 시어른들을 모시고 사는 일이 적지 아니 힘들었다.

 연년생으로 아들 둘을 낳아 키우면서 시어른들의 보살핌과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모든 게 내가 살던 방식과 달라 불편하고 힘들었다.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으로 편입되어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제사를 간편하게 축소하지 않아 시월이면 서너 번씩 제사를 지내는 일도 있었고  결혼하던 첫 해 시제를 지낼 때는 이백 명 분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고 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유난히 조상에 대한 마음이 남다르고 효성이 지극하시던 아버님께서는 평생 의사로서 번 돈을 대종손으로서 문중의 친척들과 조상들을 위한 일에 쓰시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셨다. 살아 생전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은 꼭 당신이 조성하신 가족묘역을 찾아가셨고 그곳을 둘러보며 흡족해 하셨다. 그곳은 아버님께 성역이나 마찬가지인 것 처럼 보였다. 개인적인 사리사욕보다 늘 문중을 앞세우셨고 심지어 가족보다 문중이 우선이셨다.

 아버님께서는 여든이 넘어 큰 고생 없이 세상을 뜨셨는데 얼마나 꼼꼼하셨는지 유언집은 물론 장례 일정, 앞으로 우리가 제사지낼 때 쓸 지방까지 넉넉하게 준비해 두셨다. 장례를 치를 때는 정신이 없어 뭐가 뭔지 잘 모르다가 막상 상을 치르고 현실로 돌아오고 나서도 아버님의 부재가 실감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아버님께서 ‘에미야’ 하고 부르시는 소리가 수시로 들려 돌아보는 적이 많았다.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생활하고 당신의 연년생 두 손자를 그토록 아끼던 아버님이셨고 철없고 부족함 투성이인 며느리에게 한 번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던 분이셨으니 어찌 그렇지 않았겠는가.

 돌아가시고 몇 년 동안은 아버님 기일이면 눈물이 솟구쳐 흐느끼곤 했다. 지금도 아버님 기일이면 그분의 후덕하고 예사롭지 않은 인품이 되살아나며 가슴이 뭉클해진다. 너무 가까이 지내다보면 존경심을 잃게 되기 쉽다는 말이 있듯이 평소 함께 모시고 살면서는 그분의 훌륭한 점을 간과하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이 흘러 오십 중반을 넘고 보니 그분의 의로움과 후덕함이 새삼 가슴에 사무친다. 나이 들어 어른(?)의 입장이 되고 보니 새삼 그분 생전의 처세가 떠오르며 되새기게 된다. 집안에 경사가 있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아버님을 떠올리며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큰일이나 애들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꿈에 아버님이 나타 나 상징적인 암시를 주신다. 그런 터에 나는 아버님을 우리 가족의 수호천사라고 믿는다.

 철없고 방자하기 짝이 없던 젊은 시절, 나의 부족하고 한심한 처세를 생각하면 가슴 치도록 후회 막심함이 앞선다. 아버님 어머님께서 나처럼 이기적이고 철없고 결점 투성이인 며느리와 함께 사시느라 얼마나 힘들고 고단하셨을까 생각하면 수없이 머리를 조아려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님 기일이면 외국에서 사는 큰 아들 내외와 서울에 사는 작은 아들에게 반드시 기별해  할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되새기라고 당부한다.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극진하게 너희들을 사랑해 주신 분은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나 또한 그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모으고 또 모은다. 철없고 기고만장하던 내가 시어른들의 보살핌으로 어느 정도 사람구실을 하게 되어 이 나이에 이르고 보니 새삼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된다.

 세상을 뜨신 아버님에 대한 먹먹한 그리움이 오늘도 내 가슴을 적신다. 아버님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남은 세월 의롭게 그리고 후덕하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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