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주 희(침례신학대 교수)

옛날 옛날 한 옛날 같은 때 일이다. 교회 성가대에 누군가 돌리기 시작한 책이 있었다. 얇고 문체도 소박해서 연습하다 쉬는 잠깐에 읽어치울 만했는데, 초점이 교회 가르침과 달리 인류종말로 다급했다. 곧 휴거가 일어날 것이니 그에 대비해야 한다는데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이지만 사용하고 해석하는 방식들은 전혀 달랐다. 살던 대로 살면 안 된다고 뭔가를 하라고 황망스럽게 재촉해댔다. 하나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교회 공동체의 오랜 이야기들에 비해 그 관점들은 새뜻하기는 했다. 비슷한 책들도 돌았다. 천국에 갔다 와서 썼다는 이야기, 휴거를 할 때는 사람들이 북쪽으로 몇 도쯤 기울어져서 둥둥 떠가더라는 그런 이야기들, 심지어 소녀예언자까지 등장해서 휴거 강조파들을 지원했다. 그들이 말하는 휴거는 공포와 연관되고, 살아가는 목숨은 재앙처럼 그려졌다. 그렇게 해서 세상을 만든 신은 은총을 베푸는 분이 아니라 자기 고집만 센 재앙의 유포자로 그려졌다. 예수의 죽음은 부정되었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오랜 가르침과 근거들은 배제되었다. 그래야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일지.

 그 무렵 학교 교정에는 인문대 어느 과를 다니던 학생 하나가 스피커 장치를 배낭같이 등에메고 다니면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고 절실하게 외쳐대기도 했다. 몇 학번 쯤 후배일 그 학생은 자주 눈에 들어왔다. 등록을 포기하고 그러고 다닌다는데, 행색이 추레했지만 결단은 용감한 데가 있었다. 인류가 끝장난다는 날짜까지 제시하면서 모든 재산을 다 팔아가져오라던 종파 교주는 입건되었다. 가끔 그 등록 포기생은 정상적으로 일상에 복귀했을까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거기 말고도 사이비 종파는 어느 곳에 자신들의 신당을 열어두고, 속임수와 불안을 미끼로 던지며 내세 장사들을 하며 창궐한다. 성경의 용어들을 끌어다 쓰고, 그 속의 세계관을 일부 차용하지만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을 결박해서 조종하는 신, 인간에게 모든 것을 내놓으라는 모습으로 왜곡한다.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으니 유력한 신을 위해 무력한 인간이 모든 것을 가져다 쌓아놓으라고 위협해댄다. 교주 치고 가난한 교주가 있던가. 교주 치고 사년제 신학대학에서 제대로 신학을 공부한 이가 있던가. 무당처럼 ‘무슨 산에서 산 기도 몇 년’ 식으로 자기 영험함을 강조해대니 그가 만났다는 신은 산신령인가 하나님인가. 신학으로도, 성경으로도, 상식으로도 맞지 않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후안무치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내세우는 건 기존 교회의 목사를 욕하는 일과 ‘죽어서 천국에 가려면’밖에 없는가 보다. 낙원은 우리 마음에, 우리들 사이에, 영원한 시간에 있지 않던가. 삼중의 낙원을 단순한 내세 차원으로 축소해버리고, 살아가는 시간을 우습게 만들며,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들며, 죽음에 떨게 하는 불안장사 아닌가.

 
 이 흉흉한 세월, 교주들에도 사이비 종파 신도들에도 멀미가 날만하지 않은가. 세상을 만들만치 크신 분, 하나님을 끌어다가 핑계대면서 지나치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 죽음 뒤의 세상만 강조해대는 것, 심지어 몸까지 바쳐야 한다는 미친 목소리들은 신의 것이 아니라 욕망 덩어리 인간의 소리이다. 예수 이름만 들이대면 멍청해 지지말고, 하나님 심판 이야기만 나오면 쫄지 말고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말씀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너희에게 주려는 것은 생명이고 평안이라고, 그러니 걱정 말고 모든 무거운 짐을 가져와 내려놓고 쉬라는 그런 말씀들. 포르노는 삶을 축소하고 성의 세계를 과장한다. 왜곡이라는 생각도 못하도록 중독되게 왜곡한다. 사람을 만나고 설레고 갈등하고 혼돈을 겪는 갈등과 고민의 시간이 그 속에는 없고, 이별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참고 견디는 삶도 없다. 설거지 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상은 추방된다. 사람 모습을 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사람 사는 이야기는 실상 없다. 사이비 종파들도 그렇다. 신도 인간도 구원도 세상에 대한 사랑도 없다. 왜곡과 착각과 탐욕이 있을 뿐이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려는 예수의 선의를 고의로 조롱하고, 예수의 죽음을 무력한 것으로 만들고, 예수의 뜻을 자신의 욕심으로 대체하는 포르노 같은 것들. 이런 저런 사이비 종파들이 끌어다 쓰는 ‘십사만 사천’은 애저녁에 다 차지 않았을까. 부끄러운 짓 보이며 실제보다 더 자연스러운 척하고, 위악 저지르면서 선하다고 확신에 차 있는 판단장애 유포자들, 사이비종파와 포르노는 동격이다, 징한 욕망덩어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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