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구 목사는 무덤이 없다. 서울 국립묘지에 그의 묘지가 있지만, 그 안에 시신은 없다. 그는 1949년 4월 19일 75세 나이에 ‘4?19 진남포 사건’으로 정지보위부에 끌려가 ‘반동 비밀결사’를 조직한 혐의로 재판을 받아 10년 형을 받고 평양 인민교화소에서 복역하던 중 1950년 10월 희생되었다. 그의 마지막 순간을 목격한 사람도 없고 시신도 찾지 못하였다.  
1949년 4월 어느 날, 진남포에는 낯선 청년이 찾아와서 자신은 남쪽에서 온 비밀요원이라 소개하며 5월 1일 남쪽에서 국군이 진격해 오니, 요원들을 모아 국군 환영 집회를 준비하자며 반공 인사들을 포섭하였다. 정체불명의 사람은 진남포지방의 교회들을 순방하면서 기독교 인사들을 포섭하여 30여 명의 명단이 작성되었는데, 거기에 신석구 목사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이들은 진남포 비석리장로교회 지하실에서 ‘국군환영 5도 연합 진남포 지부’를 결성하고 해산하였는데, 1949년 4월 19일 새벽을 기해 명단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시작되었다. 이것을 ‘진남포 4.19사건’이라고 하는데, 이는 기독교계 인사들을 숙청하려는 공산당의 계략에 빠져 48명이 체포되었다.
결국 ‘반공’ 의지를 꺾지 않은 신석구 목사와 10여 명은 ‘반동 비밀결사’를 조직한 혐의로 정식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은 짜인 각본대로 진행되어 재판장 김두봉은 “피고의 죄과는 사형에 해당하나 3?1항일 독립운동의 공로를 참작하여 10년 형에 선고한다”고 하였다. 신석구 목사는 “나는 사형을 받아도 좋으니 다른 인사들은 석방해 주기를 바란다. 특히 6년형을 받은 여학생 둘은 앞길이 창창한 어린 학생이니 그 두 학생의 징역 12년을 내가 질 터이니 그들만이라도 석방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인천상륙으로 북으로 쫓겨 가던 공산군은 10월 19일 평양을 내주고 청천강 이북으로 퇴각하였다. 19일 평양 교화소 문은 열리고 가족들이 시체를 찾으러 1주일을 헤맸지만 찾지 못하였다. 가족들이 신석구 목사의 시체를 찾으려고 우왕좌왕하는 중에 누군가 10일 교화소 안에서 총소리가 들렸다고 알려 주어 가족들은 그날 사망하였을 것이라고 심증을 굳히게 되었다.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가 신석구 목사의 고향이다. 청주에서 미원면 소재지를 지나 19번 국도를 따라 보은으로 향하다가 운암 만남의 휴게소 앞 운암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운암계원로를 따라가면 미원초등학교 금관분교가 나온다. 정문에서 우회전하여 575번 지방도(산외금관로)를 따라 고갯길을 오르다 보면 오른편에 개동(갯골)이라는 동리가 나온다. 현재 주소로는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금관고갯길 52(지번,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 588-2)이다.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전 겨울 끝자락에 신석구 목사님의 생가를 찾아보았다. 동리 노인에게 목사님의 생가를 물으니 10여 채 되는 동리 가운데 집이라고 가르쳐 주신다. 옛날 생가는 다 허물어져 자신이 조립식 패널로 집을 지었다는 주인을 만나 보았다. 충북도나 통합청주시에서 이곳에 생가를 복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다.
아, 신석구! 청주시 우암동 3.1공원에 가면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신 채 한복을 입으시고 당당한 모습으로 청주시를 내려다보시는 신석구 목사님을 만날 수 있다. 그를 기독교로 인도하고 함께 민족대표가 되었다가 “시대의 변함에 따라 일본 정부에게 협력하는 척했고, 아홉 교회를 살리기 위해 한 교회를 희생시킬 수 없었다”고 친일을 변명하고, “숙청당하기 전에 먼저 내가 자신을 숙청한 것”이라고, 기독교 목사였던 그가 천주교 평신도로 개종한 것을 변명하는 변절자 친구 정춘수는 빈 좌대만 남아 있다.
오직 민족을 위하여, 그리고 지신이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올곧게 살아가신 목사님, “시작도 중요하지만, 시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끝이라네”는 청청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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