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 시키면 바가지 시키고 바가지 시키면 쪽박 시킨다더니 그 말 꼭 맞어, 내 어찌 쫑말이로 태어나서 온갖 궂은 일만 떠맡는 건지 원 속이 부글부글 끓네 끓어!’ 종말인 혼자 시부렁시부렁 거리면서 마을회관 마당에 당도했다. 저쪽 마당 끝 부속건물 처마 아래에 있는 쓰레기분류 통 앞에 빙글빙글 돌아간다는 안락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둘째형은 저걸 가져오라는 것이다. 틀림없이 아버지는 둘째형한테 시켰다. “애비야, 저 마을회관 쓰레기 내놓는 데 가면 누가 버리려는지 빙글이 의자가 나와 있더라. 내 가서 보니께 한쪽 팔걸이 끝이 쪼끔 떨어져서 꺼먹테프루 감아놓았을 뿐 다른 데는 아직 생생하더라. 그것 좀 가져 오그라!” 하는 걸 똑똑히 들었다. 제일 큰형이 살림나기 전까지는 아버진 뭔 일을 시킬 일이 있을 때면 큰형을 불렀고 그 명을 받은 큰형은 한 다리를 건너 둘째형한테 옮기고 그걸 옮겨 받은 둘째형은 제일 끝 종말이에게 넘기곤 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종말이가 중학생 때라 그냥 그런 거려니 하고 고분고분 따랐는데 이제 고등학생 끝머리에 있어 사리분별을 어느 정도 알 나이에 들어섰는데도 그래서 자기에게 떨어진 명을 그 아랫사람에게 전가하는 일은 언어도단이라는 것도 알 만큼 성숙해 있는데도 아직까지 이니 그게 짜증스러웠던 것이다.
 아버지 말씀대로 빙글이는 팔걸이의 상처 외엔 말짱했다. 주위를 한번 살펴보고 앉아 돌려보니 빙글빙글 잘도 돌아간다. 마침 이른 아침이라 이러는 걸 보는 사람이 없었다. 부속건물 벽에 ‘수요일은 쓰레기 수거하는 날’ 이란 종이쪽지가 붙어 있는 게 보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수요일이다. 해가 뜨기 전 아니면 늦어도 아침밥 전엔 여기 있는 것들을 쓰레기차가 와서 다 가져갈지 모른다. 쓰레기차는 늘 아침 일찍이 다니는 걸 보았으니까. 그래서 아버진 쓰레기차가 와서 다 싣고 가기 전에 가져오도록 하려고 새벽같이 보낸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말인 빙글이를 번쩍 들어 어깨에 둘러메었다. 철제품이라 제법 묵직하다. 집으로 오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건 종말이 자신의 방밖에는 들여 놓을 데가 없다는 걸 알았다. 방이 셋인 집에 엄마 아버지 방엔 테이블이 없고 둘째형내외 방엔 신혼살림이 가득 차 있어 빈틈이 없다. 종말이 공부방엔 테이블은 있으나 큰형을 거쳐 둘째형한테서 물려받은 것이라 의자가 벌써부터  삐걱삐걱 거려 송판을 가로질러 못질도 하고 청 테이프로 덕지덕지 감아도 보았으나 오늘 낼을 장담 못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심부름 전가한 둘째형도 생각해 보니 그때 둘째형은 밭에 거름을 내려고 경운기에 비료포대를 바삐 싣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아버지와 둘째형에 대해 시부렁거리던 자신이 멋쩍어졌다. 하지만 튼튼하고 고급스런 철제의자 빙글이를 얻었다는 마음에 마냥 즐겁기도 했다.
  빙글이를 공부방에 들여놓은 종말인 다시 빙글이를 올라타고 몇 번이고 빙글빙글 돌다가 내려와서 이리저리 어루만져 보는데 등받이 뒤에 타원형의 노란 레텔 같은 게 붙어 있다. 거기 ‘대형폐기물처리권’ 이라 씌어 있는 아래로 O일련번호, O금액, O배출일시, O폐기물명, O배출자주소·성명, O연락처 난이 있고 그 아래 가운데 00면장 이라 인쇄돼 있는데, 그 중 금액 난엔 2000원, 배출자 성명 난엔 이명석 이라 적혀 있다. 이명석이라면 이장이다. 그러니까 이장이 2000원을 면에 내고 폐기물로 내다놓은 것이다. 이장의 큰아들 정현이와 친구인 종말인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이내 빙글이 몸을 닦기 시작했다. 속속들이 깨끗이 닦으려고  빙글이를 뒤집어 놓고 네 발을 번쩍 든 뱃바닥으로 걸레를 옮겼다. 그런데 뱃바닥 오른 쪽 구석에 조그만 종이포켓이 붙어 있는 거였다. 그 입구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보았다. 빳빳한 게 집혔다. 꺼내보았다. 앗 돈이다. 몇 번이나 접혀 있는 만 원짜리 지폐다. 갑자기 손이 떨린다. 세어보았다. 5만원이다. 그걸 들고 종말인 아버지께 달려갔다. “이 이 이게 빙글의자 밑바닥에서 나왔어요.” “그려, 누구네 건질 알아야 갖다주지?” “이장집 거예요 등받이 뒤에 씌어있어요.” “그럼 갖다주렴” “아이, 아버지가 갖다주셔요.” “니 의자니까 니가 갖다 줘야지 안 그러냐 이치가” 내버린 친구 꺼 주워갔다는 생각에 영 마음은 내키지 않았으나 할 수 없이 종말인 이장집으로 갔다. “허허, 그거 청주 정현이 고모 아파트에 갔을 때 폐기물로 나와 있는 게 성해 보여 가지고 온 건데 정현이가 싫다고 해서 도로 내놓은 거야. 그 돈 임자 모르는 눈먼 돈이니까 네가 가져.” 이에 종말인 졸지에 빙글이 생기고 돈까지 얻었다는 생각에 입을 헤벌리고 소리 없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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