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희 팔(논설위원 / 소설가)

        박 희 팔(논설위원 / 소설가)

정명 씨가 하우스 안에서 봄 수박 심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려 열어보니 이장이다. “빨리 오셔 집에 손님이 오셨어유.” “누군데?” “옛날 군대동기 김정하 병장의 동생 되는 분이래유.” ‘군대동기 김정하 병장?’ 그는 한참을 되 뇌이다가 갑자기 놀란 듯이 “알았어 알았어. 곧 갈게.” 하고 서둘렀다.
-하루는 선임하사관이 불렀다. “임 하사, 요즘 내무반아이들을 들들 볶는 것 같애?” “예?” “애들 기압을 너무 자주 주는 거 아냐?” “예?” “인제 제대말년이라고 끗발 과시하는 건가?” “예?” “애들한테 술 뺏어먹는 거 아냐. 계속 그랬다간 내가 가만 두지 않겠어. 알았나?” “저…?” “가봐!” 이 선임하사관은 중사도 아니고 상사(上士)다. 하사에겐 까마득한 존재요, 상사에겐 새까만 졸자일 수 있는 게 하사다. 단호하게 가보라는 데 어따 대고 항변과 변명을 늘어놓겠는가. 임 하사로선 그저 부동자세로 ‘가보겠습니다!’ 복창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억울하다.
 한 3주일 전이다. 임(임정명) 하사는 내무반으로 들어오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니들 임 하사님 맘 좋다고 겨먹지 말어. 어디서 짜식들아 상병, 일병, 이병 쌔까만 쫄짜 놈들이 고참을 몰라보구 까불구 있어. 먼저 제대한 민 하사님한텐 꼼짝 못했던 것들이…!” 김 병장이다. 김(김정하) 병장은 임 하사완 동갑이지만 호적등기가 늦어 입대도 한 해 늦는다. 하지만 임 하사는 같은 동기처럼 여겨왔다. 아무리 군대는 계급사회라지만 생일도 한 달 위여서 따지고 보면 형 발인데 차마 부하취급으로 대하기가 뭐했다. 김 병장도 그걸 알아서 스스로 직속상관대우를 깍듯이 해주는 사이다. 앞서 제대한 민 하사는 좀 까탈을 부렸다. 제대 임박해서는 남은 밥그릇 수만 세면서 이것저것 부하사병들만 부렸다. 제일로 사병들의 불평을 산 것이 건듯만 하면 주는 원산폭격의 기압이다. 물론 선임하사관의 눈을 피해서다. 임 하사는 이게 영 못마땅했다. 그러던 차 마침내 민 하사가 제대했다. 이제 임 하사가 제대를 얼마 앞두고 민 하사 자리에 올랐다. 내무반 사병들이 쾌재를 부르는 눈치였다. 한 상병은 노골적으로, “‘거’ 하고 ‘래’ 했으니 이 아니 즐거운가!” 하고 소리 높여 외치기까지 했다. 여기서 ‘래’ 했다는 건 임 하사를 두고 하는 표현이었다. 그는 민 하사처럼 굴지 않고 임무에만 충실했다. 아니 그리 실행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무반 안에서 흘러나오는 김 병장의 저 소리는 무슨 소린가? 어저께 김 병장의 말이 떠오른다. “임 하사님, 한번 내무반애들 군기 좀 잡어야겠습니다.” 그때는 그냥 한 귀로 흘려보냈었다. 이에 그는 갑자기 오기 같은 게 발동했다. ‘뭣이, 맘이 좋아서 군기가 해이해졌다고!’ 그날 그는 내무반사병들을 연병장 한 귀퉁이에 집합시켰다. “자, 지금부터 원산폭격이다. 실시!” 그리고 내무반으로 들어왔다. 얼마가 흘렀을까 그는 깜짝 놀라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모두들 일어나 있고 김 병장 들어와!” 이 추운 날 애들도 안쓰럽거니와 김 병장이 안됐던 것이다. 그래도 김 병장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서야 그는 김 병장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절대로 자기 혼자 기압을 면제받을 사람이 아니란 것을. 그는 이내 모두를 불러들이고 그날 저녁에 내 돈 들여 영내 피엑스(P.X.)막걸리로 서로의 마음을 풀었다. 그러고서도 그는 사나흘에 한 번씩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사병들에게 기압을 주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기압의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데 막걸리회식은 빠지지 않았다. 그러기 3주째 드는 날이다. 기압을 받으러 나가는 놈들의 발걸음이 그렇게 경쾌할 수가 없다. 얼굴엔 희희낙락한 표정들이다. “아니 쟤들이 왜 저래?” “오늘 또 막걸리회식이 있을 거라는 거 아닙니까.” 김 병장의 대답이다. 이래서 그날로 기압 건은 막을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선임하사관의 이 오해의 억울함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임 하사는 김 병장을 불러놓고 하소연을 하면서, “나하고는 기압이 맞지 않는 모양이야.”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한데 이튿날 또 선임하사관이 불렀다. “김 병장한테 다 들었다. 어젠 미안했다. 가봐!”
 임 하사는 제대하는 날 김 병장에게 메모지쪽지에 자신의 집주소를 적어주고 헤어졌다. -
 “형님이 올해 칠순이십니다. 중풍으로 오랫동안 출타를 못하시는데, ‘나는 이제 틀렸다. 너라도 내 대신 언제 한번 찾아가 뵈라.’며 이 주소 쪽지를 주시더라구요.” 정명 양반은 깜짝 놀랐다. 이건 틀림없이 제대할 때 김 병장에게 준 주소 쪽지다. 낡아 찌들어져 보푸라기가 일었다. “출타를 못한다구? 가세, 얼른 앞장서게!” 그는 서둘러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