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의 나(이은파)는 연애소설을 쓰고 있다. 3년 전 한 여자와 결혼한 지 1년 만에 이혼했고, 10살이 어린 애인이 있다.

오랫동안 외삼촌 문장규의 죽음은 나의 가슴에 선연한 상처가 되어 왔다. 유명 건축가였던 문장규는 나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였다. 그 뒤에는 복잡한 가정사가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열 살이었을 때 지금의 어머니와 재혼을 했고, 어느 날인가 중국으로 가는 호화 유람선에서 갑자기 실종됐다. 친모는 아버지와 이혼한 후 소식이 없다. 이후 나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한 집에서 새어머니, 외삼촌과 함께 살아왔다.

나이스한 미남형에 돈 잘 버는 건축가였던 문장규는 10년 전 아파트 25층 베란다에서 훌쩍 몸을 던졌다. 식탁에는 토스트와 커피가 남아 있었고, 빨래를 널고 있던 중이었다. 맨발이었고 카키색 반바지에 베이지색 라운드 티를 입고 있던 터였다

대체 뛰어내리기 직전까지 하얀 수건만 따로 모아 건조대에 널고 있던 평온한 정황은 무엇인지, 칼라시니코프 소총 한 자루와 실탄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그런 아찔한 방법으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 10년이 흘러 당시 외삼촌과 같은 나이가 된 지금까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버지가 실종된 기일 아닌 기일, 나는 나를 자신의 친자식처럼 지극 정성으로 돌봐주었던 새어머니를 찾아간다. 호스피스 수도원에서 마지막 생을 보내고 있는 어머니는 나에게 삶이 괴롭더라도, 모든 고통을 기억하고 미쳐버리는 대신 지난 고통을 다 잊어버린 어린애로 돌아가 매일을 사는 셈이니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소년이 ‘지난 고통을 다 잊어버린 어린애’라는 말에 공감할 수 없다.

그리고 사흘 후 불현 듯 문장규의 ‘정해진 애인’이었던 박현아를 찾기로 한다. 잘 나가는 변호사인 그녀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 맥락이 없는 나의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여 나와 만난다.

그녀와의 만남은 지독한 부조리극 같았다. 죽어버린 연인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가 하면, 그에 대한 얘기를 홀린 듯 늘어놓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 부조리극의 제작자는 신이며, 연출자는 죽어버린 문장규, 나와 그녀는 어리석은 배우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문장규가 사랑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는 것을, 그러므로 정말 연인에게서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을 당한 것 역시 바로 나였다는 것을. 사랑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한 두 사람이 서로를 잊을 수 있는지, 그런 일을 일어나게 한 신에게 불쑥 살의가 든다.

나는 칼라시니코프에 실탄을 장전하고 자살을 시도하려 한다. 그때 스마트폰이 울린다. 죽어가는 어머니가 부르고 있는 것이리라. 순간 잠이 든 나는 꿈 속에서 자신의 미로 안에 누워 있는, 울고 있는 한 소년을 만난다.

눈을 뜨자 아침이다. 호스피스 수도원의 수녀는 전화로 어머니의 임종을 알려주었다. 나는 죽음에 휩싸여 있던 순간 나를 소중히 지켜준 천사는 바로 어머니였음을 깨닫는다.
<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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