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여 들으니 구보씨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아 그랬구나. 내가 고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공부하는 동안 아내는 아이 셋을 낳고 기르며 교직생활을 하면서 가정을 지켰구나. 구보씨는 아내에 대하여 자신이 판단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판단인지를 알았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깃든 아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자기중심적인 마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아내를 아프게 한 원인이 전적으로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아내의 사랑을 받아주라는 상담 선생의 충고가 사무치도록 고맙게 그의 피부로 스며들었다.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뭔지 모를 기운이 목울대를 향해 치밀어 올랐다.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고 지내온 자신에게 겁이 났다. 아내를 본다는 왜 그렇게 부끄럽던지. 그는 무작정 걷고 또 걷다가 그만 집 앞에 다다랐다. 그런데 어제와는 전혀 다른 어떤 힘이 생겨났다. 집에 들어가기가 무서워 호흡을 가다듬지 않아도 되었다. 머뭇거리지 않고 현관문 키를 꽂았다.

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무거웠다. 아내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 맡에 앉자마자 다짜고짜로 말을 걸었다.

“여보 미안해. 내가 잘못 했어. 눈에 뭐가 씌었었나봐. 이제 내 눈 다 씻었어. 당신 말이 맞아. 내가 다 들어 줄게. 천 일 동안 들어줄게. 하고 싶은 말 다 해.”

아내는 다시 어제 했던 말을 리바이벌하기 시작하였다.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은 어떤 말이 나와도 화가 나지 않았다. 밤이 깊어 잠잠하나 싶었는데, 집 나간 아들 얘기를 꺼내며 목 놓아 울었다. 이웃이야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나도 아내를 부등켜 안고 함께 울었다.

자신을 내맡기고 들어주는 경청은 이와 같이 말하는 이를 치유한다. 말하는 이의 고통과 슬픔을 어루만져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경청은 경청하는 사람도 치유를 받는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고민(고통, 슬픔, 상처, 상실감)을 듣다 보면 자신의 고통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 그래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돈 내고 가서 들으라고 한다.

결국 경청은 상처받은 관계를 치유하는 셈이다. ‘가장 깊은 치유는 가장 깊은 괴로움과 함께 한다. 상대의 고통에 귀 기울이다 보면 자신 자신에게도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미리암 그린스팬/이종복‘감정공부’) ‘경청하고 난 후에야 상대방을 진실로 사랑하게 된다. 타인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바라는 모습의 당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마르틴 파도바니/권은정 ‘상처 입은 관계의 치유’) 그러므로 경청은 사랑의 한 방편이다.

<청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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