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시인)

▲ 이석우(시인)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고 역사를 버리면 나라도 없다”고 했던 신채호 선생의 사당을 찾았다. 지키지 못할 공약(空約)을 쏟아내고 있는 선거 방송 소음을 피해서 찾은 고드미 마을에는 봄바람이 먼저 와 있었다. 산기슭에는 벚꽃의 화사함과 진달래꽃의 수줍음이 고스란하다. 봄바람 끝에 떨어지는 꽃잎이 순정을 입에 물고 쓰러지는 처녀처럼 하염없다.
정말이지 봄바람과 더불어 춤추고 싶은 계절이 아닌가. 1907년 국민의 애국정신 기운을 확인하고 기쁨에 들떠서 쓴 선생의 시 한편이 떠올랐다. 황성신문의 논설 말미에 삽입한 시인데 선생의 시 중에서 이렇게 봄의 열정이 넘치는 시는 다시  없을 것이다.

소맷자락 바람에 펄럭이니 / 높은 하늘의 무지개 같구나 / 동으로 돌고 서로 휘돌며 / 강산은 끝없이 넓기만 하여 / 춤추는 내 소맷자락 막힘이 없네 // 소맷자락 바람에 팔랑이니 / 실버들 간드러진 허리 같구나 / 바다는 저물고 하늘은 아득하여 / 하늘의 먼지 다투어 사라지니 / 춤추는 내 소맷자락 때 묻지 않네 // 소맷자락 바람에 살랑거리니 부용의 갓 핀 꽃망울 같구나 / 길게 노래하며 몸 굽혀 춤추니 / 사천만개의 춤추는 소맷자락이네 (신채호 선생의「起舞春風:일어나 봄바람에 춤추다」전문)

금년은 단재 탄생 136 주년이며 순국 80주기가 되는 해이다. 도올은 “단재 신채호를 모르는 자 이 민족을 이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선거방송 소음 속에 단재 선생의 이야기는 섞여 있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무슨 심사일까.
단재 선생은 1880년 12월 8일 대전 동구 어남동 도리미에서 신광식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곳은 신채호 선생의 할아버지 신성우의 처가로 아버지 신광식이 세상을 떠난 1887년 까지 살았다. 그때 선생의 나이 8세였다.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하게 된 선생은 할아버지 신성우에 의하여 교육을 받았다. 신성우는 과거 급제를 통해 사헌부 장령의 벼슬에 오른 분이었다. 당시 사헌부 관헌은 선발 당시 엄격한 자격과 불의와 부정에 타협하지 않는 강인한 성품을 갖추어야 했다. 자연히 신채호 선생은 할아버지의 강건한 품격과 정신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홉 살에 ‘자치통감’을 해독하고 삼국지와 수호지를 읽고 행시를 지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된다. 사서삼경을 읽는 손주에게 새로운 스승을 찾아주게 되는데, 그가 바로 석헌 신승구였다. 신승구의 집은 가덕면 청룡리(靑龍里))리에 있다. 청룡리는 바랑골이라고 부른다. 이는 스님 혜운이 시주 바랑이를 열고 터를 잡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청룡사는 임진왜란 때까지 500년간 번성을 누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뒷산과 사찰이 크게 흔들렸는데 잠시 후 한 무리의 병사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주지가 그 연유를 물으니 한 장수가 이르길,"뜻한 바 있어 산혈(山穴)을 끊었노라!”고 답하였다. 그가 바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었다고 한다. 이후 청룡사는 그 빛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일까 지금 청룡리에서는 ‘마을 보호뒷동산 개발’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단재의 새 스승이 된 석헌 신승구의 집은 200년 넘은 은행나무가 서 있는 청룡사 옆에 붙어 있다. 석헌은 단재 집안과는 먼 친척이며 진사를 역임하였다. 지금도 청룡마을에 진사댁의 안내표지가 걸려 있다.
1890년 3월 17일 신승구공이 이 토지와 가옥을 마련하였고 사랑채에서 1896~1897년까지 단재 신채호 선생이 공부하였다. 2008년 5월 27일 고령신씨종친회가 취득하여 현재 재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청주시 비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단재는 이곳까지 삼십리 길을 오가며 청운의 꿈을 키웠다. 이곳에 청소년수련관이라도 마련해야하지 않을까? 오직 김병우 교육감님은 단재 신채호 정신을 이어받는 교육을 하겠다고 선거 공약하였다. 그러나 청룡마을 단재의 공부방은 모르시는 모양이다. 집은 일차선 끝에 있는데 지금 커다란 컨테이너 박스가 공부방 문을 가로막고 있다. 무지(無知)가 역사를 가로막고 있다면 그것도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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