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 한희송(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필자는 여러 종류의 교육현장에서 종종 청중들에게 학습의 근본원리에 관계된 질문을 한다. 예를 들어 ‘A가 밥을 3그릇 먹고 사과를 2개 먹었다면, 그는 총 얼마를 먹었나?’ 또는 ‘사과 2개와 사과 3개를 곱하면 몇 개인가?’ 등과 같은 기초적인 문제인데 매우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대부분 앞의 문제에 대해 5라는 답을 도출하고 두 번째 문제에 대해 6이라는 답을 생각해 낸다는 사실이다. 이는 대수학(代數學)의 기초인 1,2,3,4... 등의 숫자가 무엇을 나타내는지에 관한 것과 +, -, ×, ÷, 로 표시되는 연산(演算)이 일어날 수 있는 범위에 대한 기초개념이 미약한 수준이라는 의미이다.
이 두 문제 모두 수학적 연산으로서는 계산이 불가능한 것들이다. 밥 3그릇과 사과 2개는 원칙적으로 하나의 연산으로 묶을 수 없는 사건들이다. 예를 들어 꿈을 두 번 꾸고 화를 한 번 냈다면 이는 그저 그런 사실을 나타낼 뿐 2+1라는 계산식을 통해 3이란 답을 이끌어 낼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3은 무엇을 나타낼 수 있는가? 꿈인가? 아니면 화를 낸 횟수인가?  또한, 사과가 2개 씩 든 봉지가 3개 있으면 2x3으로 표현이 가능하다. 그런데 사과 2개와 또 다른 사과 3개가 어떻게 곱해질 수가 있고 그 답이 6일 수가 있는가? 만일 2개, 그리고 3개의 사과를 이용하여 6개의 사과를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수학이 아니고 마술이다.
이 세상에서 원칙적으로 모든 숫자는 어떤 것을 대신하여 나타내는 대수(代數)들이다. 이 수들이 나타내는 사물이나 사건 등을 ‘집합’이라고 한다. 따라서 수의 연산은 그 수들이 나타내는 집합의 원소가 무엇이냐에 따라 연산이 가능하거나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적이 좋은 학생에 이르기까지 그저 숫자놀음으로 수학을 인식할 뿐 그 대수적 연산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해 본 것 같지 않다. 수학적 연산의 근본적 이유에 대해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하루 종일 이와 관련된 산수(算數)를 해야 하는 이유는 놀랍게도 ‘수’를 배우기 위함이 아니요 ‘수’에 관한 문제에 정답을 맞히기 위함이다. 정답을 맞혀야 하는 이유는 또한 ‘수학’을 잘 하기 위함이 아니요 ‘성적’을 높이기 위함이며, 성적을 높이기 위한 이유는 놀랍게도 자신의 삶과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 위한 분별력을 키우기 위함이 아니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에서의 공부의 현주소이다.
인간의 존재와 인식에 관한 해답을 추구할 능력은 학문적 노력에 가장 크게 연동되어 있다는 것이 인류가 지난(至難)한 역사를 헤쳐 오며 지금까지 찾아낸 즉, 최소한 현재까지의 최선의 답이다. 이것의 물질적 결과물이 현재 세계가 보여주고 있는 발전의 모습이며 인류가 누리고 있는 풍요이다. 물질세계는 그것 자체를 추구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 진보의 크기가 물질적 가능성을 결정한다.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공부의 목적이 점수와 등수에 있는 순간 학문은 그 개념 자체에서 왜곡을 겪는다. 이는 인간의 삶의 근본적 개념을 모호하게 한다. 그리고 그 정신적 빈곤이 한 사회를 지배하면 그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진리와 관련된 어휘들의 개념이 마땅히 서야할 자리를 잃는다.
2014년 현 정부의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이 제안되었을 때 ‘교육’이란 단어가 견뎌야 할 왜곡의 수준이 이 정도까지 왔는가? 하는 놀라움을 느낀 적이 있다. ‘공교육정상화법’이라는 약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간에는 ‘선행학습금지법’이란 이름으로 개념화 되어있는 이 법의 2조 3항에서 선행학습이란 ‘학습자가 국가교육과정, 시.도교육과정 및 학교교육과정에 앞서서 하는 학습’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런 종류의 학습에 관한 접근 방법은 학습자가 타율적이며 스스로의 호기심의 발로로 인한 것은 학습의 개념에 포함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
교육은 철저히 자율적이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방법이라 할지라도 학습자 자신이 거부하는 경우 교육행위는 실현될 수 없다. 따라서 학습자가 스스로의 호기심이 최소한만이라도 이행될 때 교육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 중학생이 수학에서 원(圓)을 공부할 때 반지름을 'r'이라 표기하고 지름을 'd'라고 표기하는 것에 대해 왜 그런지 궁금해 한다면 그것은 그가 공부에 관한 매우 바람직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이 학생에 대해 중학수학시간에 영어에 대해 궁금해 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더더구나 반지름을 영어로 radius라고 하고 지름을 diameter라고 하기 때문에 그 앞 글자를 딴 것이라는 사실을 궁금해 한다는 것은 교육부에서 권장하는 중학생이 알아야 할 단어의 수준을 넘는 선행학습이라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때 동법(同法)은 그 시행의 가치를 가질 것이다.
이 법은 시행 1년 만에 선행학습을 부분적으로 허용하는 개정안을 가지게 되었다. 그 개정안이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를 통과했고 19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처리될 전망이다. 2019년 2월 28일까지라는 시한을 부칙으로 달고 현재 국회에 계류되어 있는 이 법안은 일반학교에서 방학 중에 운영하는 방과후학교 과정과 농산어촌의 중·고교 및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저소득층 밀집 학교에서 운영하는 방과후학교 과정에서 선택 될 수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개정안마저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을 개선시키는데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예상은 이 법이 해석하고 있는 교육과 학습의 개념이 교육의 근본으로부터 그리 가깝지 않기 때문이다. 이 법이 현재의 설왕설래를 만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고 이 법의 미래가 걱정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교육과 학습의 형식적 개념화가 지금까지 우리나라 현대교육의 역사를 멍들게 해 왔다. 공교육정상화는 교육의 본질에 대한 형식적 해석을 통해 이룰 수 없는 일임을 우리는 지금까지 수도 없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증명해 왔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이다. 이번 논란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자신과 교육자들과 학생들을 믿고 교육의 본질을 향해 서로 사랑하며 같이 가려는 노력만이 늦더라도 교육의 개념을 올바로 정립시킬 수 있는 일임을 상기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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