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웅렬 <옥천 교육지원청 교육장>

 

청암 유형석과 무외 유규호는 필자 웅비 류웅열과 더불어 한 집에서 하숙했기 때문에 금산초의 유삼총사라 불리곤 했다.

1974년 4월 16일. 그날의 기억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교직생활 42년 중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서린 제천의 금산초. 20여년전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어 지금은 갈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의 그곳! 청주에서 충주까지 버스로 2시간, 충주에서 제천까지 또 1시간, 제천교육청에서 발령장을 받고 수산면까지 버스로 다시 또 1시간, 수산면 소재지에서 지곡리까지 30분 또 버스를 타고 갔다. 그리고 남한강을 건너야 목적지 금산초인데, 이미 해는 저물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배가 없었다. 나루터에서 강 건너 편에다 대고 ‘배 건너~~!’ 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더니 한참 후에야 뱃사공이 알아듣고 배를 띄워 주었다. 하루 종일을 걸려 도착한 그곳. 전기도 없고 전화도 없는 깜깜한, 산골짜기 9학급 400여 명의 학생과 15명의 교직원이 근무하는 작은 학교였다.

어느 해 여름방학 때 홍수가 났는데, 강물이 교문 앞까지 차올랐다. 학교에 남아있던 교장선생님과 나는 1층 교무실에 있는 귀중한 서류와 장부를 2층으로 옮겼다. 대충 물건을 선정하여 옮겨놓고 기다려 보았다. 밤 12시 쯤 불어나던 수위가 멈추는 것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 숨을 쉬며 잠을 청하였다.

금산에서의 소풍은 각별하다. 금산초 학구가 도화리, 능강리, 하천리, 상천리 4개리로 되어 있어 지역을 순회하여 소풍 장소가 결정되었다. 봄소풍은 상천리 백운동, 가을소풍은 도화리 취적대, 다음해 봄소풍은 능강리 본동 취벽대, 가을소풍은 하천리 내매…. 소풍날은 동네 잔칫날이다. 동네 주민들은 국을 끓이고 밥을 지어 선생님들과 타동네 학부모님들을 대접하며 점심식사를 즐기고 전교생에게 학용품을 선물하기도 했다.

1976년에는 6학년을 맡아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이른 새벽에 학교를 출발하여 북진 버스 종점까지 30리 길을 걸어 시내버스를 타고 제천역에 도착하여 경주와 부산을 돌아보는 여정이다. 여기서 아직도 생생하게 들려오는 추억의 목소리가 있다. 열차 안에서 “야, 저기 전봇대다.” 누가 소리를 지른다. “어디? 어디?” 달리는 열차 안에서 보이는 전봇대를 보며 신기해하곤 했다.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청암과 계산을 하고 나와 보니 아무도 없다. 모두들 태종대의 해양대학으로 출발해 버린 것이다. 휴대전화도 없던 때이니 서로 연락할 방도가 없다. 할 수 없이 기다리다가 숙소에서 만났다. 모두들 해양대학에 가서 배도 타고 좋았다고 자랑을 하였다.

1977년인지 어느 해, 무척이나 가뭄이 심하였다. 초등학생들도 모내기 봉사활동을 하라고 교육청에서 공문 지시가 내려왔다. 가까운 능강리에서 몇 집이 모내기 신청을 하여 아이들과 함께 모심기 봉사활동을 나갔다. 농촌에서 자란 아이들이라 지도할 것도 없다. 알아서 척척 나보다도 모를 더 잘 심었다. 일을 마치고 나면 논주인이 국수를 말아 주셨다. 별 반찬도 없이 국수만 먹는데도 꿀맛이었다. 지금도 그 국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엔 매달 주민반상회가 있었다. 그리고 반상회 장소엔 공무원을 파견하였다. 교육공무원도 예외없이 학구내 자연부락 단위로 담당공무원 지정을 받았다.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능강리와 도화리, 하천리의 골무실이나 진경동 등은 선배 선생님들이 담당하였고, 먼 지역은 우리 삼총사가 맡았다. 반상회가 끝난 후 저녁도 얻어먹고 한 밤중에 약 5km 거리의 강변 숲길, 산길 등을 지나 돌아왔다. 술이 거나해지면 못이기는 척 하룻밤 신세를 지고 다음 날 아침 식사까지 같이 하고 학교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한 달에 한 번씩 늘 언제나 마음 편하게 대해 주시던 송호리, 조필, 내매 학부모님들이 그리워진다.

나에게는 체력 단련은 물론 심신 수련의 기간이었고, 어린이들과 학부모와 가장 친밀도가 깊었던 때였고, 그 동안 꿈꾸어 왔던 자연과 함께하는 교육도 실행에 옮겨 보았던 소중한 5년이었다.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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