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시인)

▲ 나기황(시인)

예년과 달리 연말모임 분위기가 새해 덕담조차 공허하게 들릴 정도로 가라앉았다.
세태 탓인지 ‘풀치다’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자는 송년 인사가 긴하게 귓가에 맴돈다.
‘풀치다’는 ‘(맺혀 있던 마음을)돌려 너그럽게 용서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순 우리말이다. “풀쳐 생각하다”처럼 쓰이고 있다. 명사로는 ‘풀쳐 생각’이 있다. ´맺혔던 생각을 풀어 버리고 스스로 위로함´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곳곳을 돌아보면 맺히고 막혀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을 풀어내기란 또 얼마나 고통스런 일인가. ‘스스로 깨닫고 위로 받는다’는 의미가 새길수록 의미심장하다.
꼬인 실타래를 풀고 끝을 더듬어 돌려 생각한다는 행위가 결코 쉽지 않은 경지다.
마침 최근에 읽은 시 중에서 ‘풀쳐 생각’의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시구가 생각난다.(충북예총회보/2016년 12월 21일자)
‘온갖 회한과 참절의 아픔을 누르고/이제는 격랑을 잠재우는 시간/누리에 해가 저문다/2016년 병신년의 다사다난한 민낯을 싸안고/해가 저문다’는 구절이다. 보통이라면 ‘내일이면 다시/해가 뜨리라/뜨는 해 마주하여 옷깃을 여미고’ 하는 대목이 더 희망적으로 다가왔을 터이지만 올해는 목을 베고, 팔다리를 끊는 ‘참절(斬截)’의 아픔을 누르고, ‘격랑을 잠재우는 시간’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시인은 저무는 해에 모든 것을 ‘풀쳐’ 내고 살아있음이 꽃(희망)임을 깨닫자고 권한다.

2016년을 관통한 사자성어 중에도 꼭 풀쳐내야 할 것들이 남아있다.
연초부터 ‘혼용무도(昏庸無道)-어리석은 군주의 잘못된 정치로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참된 도리가 먹히지 않는다.)’가 화제가 되더니, ‘거세개탁(擧世開坼-온 세상이 혼탁하다)’으로 발전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까지 번진 탄핵정국을 순리적으로 풀쳐내야 한다.
‘구지부득(求之不得-아무리 구하려 해도 구하지 못함)’으로 일자리를 찾아 방황하는 젊은
이들도, 열심히 노력해도 ‘구복지루(口腹之累-먹고 사는 게 걱정이다)’상태를 벗어날 수 없는 현실도 하루빨리 풀쳐내야 한다.
중소기업에서는 새해 사자성어로 '파부침주(破釜沈舟-밥 지을 솥을 깨뜨리고 돌아갈 배를 가라앉힌다)를 뽑았다 한다. 최악의 경제상황을 극복해 보려는 중소기업의 결의가 느껴진다.
‘풀쳐 생각’의 핵심은 화해와 용서 그리고 위로다. 닫힌 마음으로는 화해 할 수도 없고, 위로 받을 수도 없다. 거의 매일 SNS를 통해 ‘촛불’과 ‘태극기’로 상징되는 두 진영에서 밀서(密書)를 보내고 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 수준의 비방이거나, 황당무계한 ‘찌라시’ 수준의 메시지가 연일 날아든다. 촛불은 태극기를 아예 태워 버리려하고, 태극기는 어떻게든 촛불을 꺼버리려 한다.
용서는 신의 영역이라고 하지만, 화해하고 위로받는데 그렇게 거창할 필요는 없다.
말기 암에 걸린 젊은 엄마가 어린 아들과 이승에서의 삶을 정리하는 눈물겨운 모습에서 우리는 ‘살아 있음이 꽃’임을 느끼며 위로를 받는다.
“내가 엄마를 필요로 할 때 엄마는 정작 내 곁에 없었어.” 가시 돋친 딸의 상처를 보듬어주는데 “엄마가 미안해” 따뜻한 한마디면 충분하다.
겹친 불행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강연 100℃’에서 벼랑 끝에서 돌아서라는 진심어린 권고를 들을 수 있으면 된다. 용서와 화해의 시기일수록 ‘풀쳐 생각’이 필요하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풀쳐야 할 것은 풀쳐 버리고 새해답게 새해를 맞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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