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 한희송(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도도한 역사의 물길이 인간이성에서 그 종착역을 찾을 것이라는 기대는 그 명제를 바탕으로 성립된 근대의 초기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감정적요소와 대립된 개념으로서의 이성이 객관적 논리만을 이용해야 접근이 가능한 데카르트의 해석적 명제들과 향기로운 밀애를 즐기는 동안 도형들 간의 이성적 구분이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명제가 이미 위상수학(位相數學)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기 위해 꿈틀대고 있었다.
  1700년대의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은 프레골랴강에 놓여진 7개의 다리를 한 번씩만 건너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산책방법을 찾고 있었다. 세속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 순수한 욕구를 이룬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시민들에게 절망감과 함께 그러한 방법에 대한 극단적 호기심을 동시에 증폭시켰다. 이러한 갈망에 찬물을 끼얹는 대신 인류사에 뚜렷한 족적으로 남을 수학적 성과를 택한 오일러는 지금은 칼리닌그라드라고 불리는 이 도시에서 시민들의 욕구가 불가능에 대한 도전일 뿐이라는 슬픈 결론을 1735년 8월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 학술위원회에 보고했다. 그래프이론이라 불리는 위상수학의 한 분야가 탄생한 것이다
  아무리 정교한 기술로 동그란 원을 그린다 해도 표면이 울퉁불퉁하다면 그 것을 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동그란 원을 그렸더라도 그 울퉁불퉁한 면을 평평하게 펴서 본다면 그것은 구불구불한 타원이 된다. 즉 도형은 그리고자 하는 사람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려진 표면이 얼마나 변화의 국면 즉 위상(位相)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표면의 생김새에 따라서 원으로 그려진 도형은 충분히 삼각형 또는 사각형 등의 다른 도형으로 보여 질 수 있다.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논리를 통해 어떤 일의 결과를 정확히 예견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과학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이렇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2차세계대전의 승전국에 슬쩍 합승한 러시아는 전후의 과실을 나누는 자리에서 러시아의 숙원인 부동항(不凍港)에 대한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발틱해를 향해 가슴을 열어놓은 쾨니히스베르크에 러시아의 깃발을 꽂고야 말겠다는 스탈린의 의지는 전범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놓여있었던 독일의 존립을 보장하고야 말았다. 그 대가로 이 도시는 러시아혁명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던 칼리닌의 이름을 따라 개명하게 되었다.
  프로이센의 영토로서 쾨니히스베르크는 이성의 시대에 종언을 선언한 철학자 칸트를 위해서도 그의 품을 열었다. '순수 이성'은 아무리 그에 어울리는 논리과정을 찾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인간역사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통해 칸트는 '이성의 시대'에 비판의 대상이었던 포스트모더니즘적 비합리성에게 문명을 위한 필요조건으로서의 위치를 부여했다. 비합리성의 합리적 인정이란 개념이 사람들에게 남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능력을 갖게 한 것이다.
  역사의 발전은 형식적 측면을 보는 시각과 실질적 측면을 보는 시각의 합일을 이루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고대에서부터 지난 시대까지 노동을 담당하는 계급과 유한계급(有閑階級)은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브루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결구도를 이끌어낸 마르크스의 생각은 이 시기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지식노동자의 출현이 두 계층의 퇴화를 종용하고 있는 것이 현대이다. 지식이 결여된 육체노동자계급은 그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그 수를 줄여가고 있으며 생산현장에 속해있지 않았던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노동의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서 역사에 새로운 개념들을 불어넣고 있다. 이렇게 이성과 감성의 합일과 실질과 형식의 소통은 역사발전의 다양한 경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들이다. 교육 역시 외면과 내면의 구색을 더욱 조화롭게 하는 방향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찾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학문은 물질적 풍요를 위한 수단이며 물질적 풍요는 가장 믿음직한 행복의 수단으로 정의되어 있다. 이 수단을 쟁취할 확률은 점수와 등수로 확인할 수 있다는 법칙도 철저히 확립되어 있다. 그러나 진정한 교육은 이러한 개념을 타파하고 실질적 의미에 집중하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수단이다. 이 진정한 의미의 퇴보를 진화로 인식하는 것이 현재 일반 국민들의 가슴에 있는 교육의 흐름이다. 개혁의 당위성을 교육본래의 의미에서 이 시대가 보아야 할 시점이란 뜻이다.
    오일러에게 그래프이론의 선구자라는 위치와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친구와의 축배를 선물했던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는 7개 중 3개만 남기고 이 도시의 이름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히틀러의 유보트(U-boat) 군항지가 흔적을 찾기 힘든 이유는 이 땅이 이제 칸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았던 독일이 아님을 의미한다. 러시아의 서구식 발전을 염원했던 로마노프가의 표토르 대제는 발틱함대가 이 땅에서 그 근거지를 찾았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딸 엘리자베스 1세가 7년 전쟁의 와중에 잠시나마 이 땅을 점령했던 것이 1758년 1월 24일이다. 그 이후로도 역사는 여러 번의 변곡점을 만들어 왔다. 이 변화가 오늘 우리에게 교육개혁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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