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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이어쉼’<유영선>유영선(동양일보 상임이사)
   
▲ 유영선(동양일보 상임이사)

나이 탓일까, 카페인 탓일까, 갑자기 까마득해지면서 기운이 빠질 때가 있다. 사무실에 있을 때는 쉬면서 회복하면 되지만, 거리를 걷다가 그런 느낌이 올 땐 참으로 난감하다.

한번은 서울 광화문 주변에서 주저앉고 싶을 만큼 피로를 느꼈는데 둘러봐도 쉴 곳이 없었다. 짐을 든 채 얼마를 걸었는지 진땀을 흘리다가 겨우 커피숍 하나를 발견하곤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시고 쉬었더니 괜찮아져서 일을 보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지난 토요일도 서울 거리에서 난감한 일이 있었다. 그날은 몸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중간에 남는 시간을 때울 곳이 마땅치 않아서였다.

외국인 여학생들을 위한 멘티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약속 장소로 간다고 한 것이 시간을 예측치 못해 너무 일찍 간 것이다. 교육실에선 아직 끝나지 않은 다른 교육이 진행되고 있었고 빌딩의 좁은 복도는 기다릴 곳이 없었다. 전 같으면 1층에 커피숍이 있어서 그곳에서 기다리면 되었지만, 어느새 1층엔 커피숍이 없어지고 치과가 들어서 있었다.

그때 문득 ‘이어쉼’이 생각났다. ‘이어쉼’. 보험설계사나 학습지교사 우유배달원 등 고정된 업무공간이 없이 계속 이동하며 일해야 하는 여성근로자들이 이동 중간에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만든 공간. 그게 이어쉼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내가 찾은 곳은 동작여성인력개발센터 안의 ‘이어쉼’이었다. 이곳의 ‘이어쉼’은 2층 한편에 있었다. ‘이어쉼’이라고 쓰인 작은 나무 팻말에는 “이동하는 여성근로자분들과 지역주민을 위한 쉼터입니다”라는 문구가 있었고, 휴식과 간단한 식사 등이 가능하도록 테이블과 의자, 커피포트 등 가전제품과 컴퓨터 그리고 약간의 도서가 구비되어 있었다.

일단 피로한 다리를 풀고 의자에 앉아 쉴 수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커피 한잔을 빼서 향을 맡고 나니 갑자기 더없는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이 넓은 서울 공간에 이렇게 작고 소박한, 그리고 편안한 공간이 숨어 있다니.

숨을 돌리고 보니 나만 이곳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30대쯤 돼 보이는 여성 한 사람은 의자에 짐을 내려놓고 컴퓨터를 만지고 있었고, 잠시 뒤 그 여성과 배턴을 주고 받듯 또 다른 여성이 들어오더니 여유있게 커피 한잔을 뽑아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휴일 임에도 누군가를 위해 문을 열어 두는 ‘이어쉼’. 그리고 그 마음을 알 듯 요긴하게 휴게공간을 이용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이런 것이 진정 살아있는 여성정책, 섬세한 행정이 아닌가 생각됐다.

지방의회 A여성의원은 지금도 의원 초기 이야기를 곧잘 한다.

등원 첫날 의회 화장실에 갔다가 화장실 안에 소지품을 놓을 곳이 없는 것을 보고, 작은 선반을 설치토록 제안한 뒤 모든 이들의 불편함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작은 선반은 여성들이 지갑이나 소지품을 올려놓는 것은 물론 남성들도 핸드폰을 올려놓을 수 있어서 작은 생각이 불편을 해결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섬세한 행정은 우리들 주위에서 점차 늘어나고 있다. 고속도로 휴게소 중에는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수유를 할 수 있는 방을 만든 곳이 있고, 언제나 줄을 서야만 하는 여성들을 위해 여성화장실 개수를 늘린 공중화장실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도시의 자전거도로는 여전히 도로를 막는 턱으로 연결이 끊어지고 보도블록은 울퉁불퉁해서 여성들의 구두 뒷굽이 망가지기 일쑤다. 간판이 튀어나와 다칠 위험이 있는 곳도 많고, 데크로 만든 길에선 못이 빠져나와 불안하다. 고령자가 많은 일본의 아키타 시의 정책은 섬세한 행정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 고령친화도시 구축을 위한 배려로 거리에 열선을 깔고, 도로 턱을 없애 노인이 넘어져서 다치지 않도록 배려했으며, 상점 앞엔 의자를 두어 쉴 수 있도록 하고, 친환경 버스정류소, 공공시설의 이중 핸드레일, 요양시설과 병원의 운영 시스템 등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세심한 배려로 노인들이 행복한 도시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제 우리도 새 대통령을 맞아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수많은 정책들이 만들어지고 시행될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 모든 정책 속에서 큰 것보다 피부에 체감되는 세심한 정책, 섬세한 행정을 원한다는 것은 새 정부는 잊지 말길 바란다.

동양일보  dynews@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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