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희 <소설가>

20년 전에 함께 살았던 그녀와 나는 틈나는 대로 아파트 뜰에 피어 있는 넝쿨장미를 보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정치에 발을 디딘 변호사 남편을 걱정하는 그녀는 중소기업을 하고 있는 아랫집 사는 나의 남편을 부러워했었다.

IMF 경제위기가 몰아쳤다. 어느 날 나는 아파트에서 쫓겨나게 됐다. 어린아이들 손을 잡고 가장이 되어 이사 가는 나의 뒷모습을 보며 이 세상에 정말 하느님이 계신지, 저렇게 착한 순희가 망하다니 하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는 소리는 훗날 그녀의 친정어머니에게 들을 수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던 늦가을, 나는 이제 다른 세상으로 들어섰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을 먹여 살리려면 음식솜씨가 있는 네가 연수동 상가에서 포장마차라도 해야 한다”며 생활정보신문을 들고 내가 사는 허름한 서민 아파트 문을 두드렸던 그녀.

우리가 망할 때 부동산 등기며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은 모두 서류에 불과 했다며 그것이 사라졌을 뿐이니, 그 서류가 그대로 장롱 깊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말을 하며 감정의 사치를 부리던 나에게 연수동 상가를 끌고 다니며 장사할 것을 권했다. 일자리를 달라고 기도는 했지만 자신감이 없어 사람들 앞에서 음식을 만들어 판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 망설이다가 지금의 가게자리를 발견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어색하게 서 있는 낡은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일주일을 우동 만드는 법을 전 주인에게 배우긴 했지만 마지막 국물 내는 법을 전수하러 가는 날에 나는 포기선언을 하고 말았다. 겁이 났다. 사람들이 들어와 나를 쳐다보며 “사모님이 이곳에 왜 있어요?”하며 물어 보기도 하고, 망했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종종 이곳에 식당아줌마로 취직을 했느냐고 물었다. 삶의 한 가운데 우뚝 서야 하는데 자꾸만 주변사람들의 눈들이 따갑게 와 닿았다. 믿었던 남편 친구들은 약간 반말을 하는 듯도 해 나의 자존감은 내려 앉았다.

우동 한 그릇에 3000원인데 가게 세와 재료값에 가스비, 전기세를 내고나면 남는 것도 없이 잘못하면 빚쟁이가 될 것 같았다. 사람들 앞에서 “어서 오세요” 란 말을 도저히 할 용기가 없어서 실내 포장마차에 출근하지 않았다. 우동집 전 주인과 가계약까지 해놓고 이제 더 이상 못하겠다는 말에 희수는 이럴 때 인생 공부 한다 생각하며 과감하게 저질러야 한다며 야무지게 나를 일으켜 세워 허름하고 지저분한 가게를 며칠 동안 청소 하더니 가게는 윤이 났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아끌어 이름도 없는 우동집 문을 열게 한 것이다.

집에 가서 혹시 일주일도 못 버티고 손을 들까봐 걱정이 태산이었단다. 일이 서툰 나를 걱정해서 집에서 파를 썰어 오고 손님들을 불러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동국물을 더 맛있게 만들 수 있을까 틈틈이 가게에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우동집 문을 열어준 고마운 친구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의 처지가 그녀랑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질퍽한 저잣거리 이야기를 그녀 앞에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그녀의 손을 놓아 버리고 있었다. 친구가 변호사 부인이라는 말을 해서 현실 신분 상승을 원하는 사람 같기도 하고 나 때문에 그녀 신분이 낮아 질까봐 겁이 나기도 했다. 모진 세월이 많이 흘렀다. 문득 아파트 넝쿨장미를 보며 그녀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그 시절 나를 많이 보고 싶었다며 울먹였다. 정치의 꿈을 접었다던 남편안부와 큰 사업을 꿈꾸던 남편이야기를 하며 그래도 그 시간이 젊어서 좋았다며 수다를 떨었다. 내가 이사 가던 날 값진 살림살이를 놓고 갔는데 그 속에서 수제로 만든 넝쿨장미 바구니를 들어다 간직하며 내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던 넝쿨장미 속에서 얽히고설킨 인생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나를 멀리서 바라보며 살았다고 했다. 아파트 담 너머 넝쿨 장미는 헤프게 웃어 대는 바람기 있는 여인네 웃음소리 같다. 후욱 가버린 청춘 앞에서 이제 그녀는 막걸리 한잔 나눠 마실 수 있는 친구로 다가와 주었다. 흐드러진 넝쿨 장미의 진한 꽃향기가 20년이 훌쩍 지나버린 우동집 안으로 들어와 촉촉한 김이 되어 눈물방울로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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