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충북도청 투자유치과>

나는 마음이 힘들 때나 중요한 일을 앞둘 때면 15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곤 한다. 잘 해결되게 도와주십사하는 구복적인 생각보다는 만일 아버지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그런 이유에서다. 실제로 도와달라고 부탁드린 적도 있지만 효과는 신통찮았다. 그냥 아버지는 영원히 떠나신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한동안 아버지의 운전면허증을 부적처럼 지갑 속에 넣고 다녔었는데 삼년이 채 못돼 내게서 사라지고 말았다.

해외출장 중 파리의 공항을 경유하면서 날치기범의 손에 내 서류가방이 넘어가고 말았는데 지갑 속에 고이 끼워두었던 아버지 면허증도 함께 사라지고 만 것이다. 현금과 서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아버지 면허증이 더 이상 나와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너무 허전했고 누군지 생김새도 모르는 그 날치기범을 두고두고 저주했다. 지금쯤은 아버지의 면허증이 만리타국에서 떠돌지 말고 완전히 산화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요즘 말로 ‘딸바보’셨던 아버지는 두 아들보다 두 딸을 훨씬 귀여워하셨고 뭐든 관대하게 대하셨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야단을 맞아본 기억이 한 번도 없다. 게다가 아버지는 강인한 해결사셨다.

내가 열 살 쯤이던 어느 해 여름날 소나기가 심하게 퍼부었는데 급기야 우리 집 부엌의 천장이 무너져 버렸다. 집에는 두 살 많은 언니와 나밖에 없었고 우리는 엉엉 울면서 어찌어찌 아버지에게 연락할 수 있었고 한두 시간 후 집으로 들어서는 아버지를 본 자매는 온 힘을 다해 더욱 목청껏 울어 젖혔다. 두 딸을 대충 달랜 아버지는 평이한 얼굴로 연장을 챙기시는가 싶더니 거짓말처럼 뚝딱 부엌 천장을 말끔히 고쳐놓으셨다. 그때의 아버지는 정말 영웅 그 자체였고 다시 일터로 향하는 아버지의 든든한 뒷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수많은 위기상황이 올 때마다 아버지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당신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아버지의 그런 면을 늘 보았기 때문에 나 역시 성장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운에 맡기기보다는 나의 노력으로 해결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요행이나 편법을 택하지 않다 보니 미련하게 힘든 길을 갈 때도 많았지만 아버지의 딸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이 마흔 즈음 자식들 교육을 위해 안정적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셨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용감하셨다. 아버지가 현직에서 물러나 집에 계실 때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행운을 누리게 됐다. 아버지는 사계절 내내 이른 아침 나가셔서 출근하기 전 내 차를 깨끗하게 청소해놓으셨다. 차 내부를 좀 깔끔하게 정리하고 다니면 좋으련만, 동물 사체를 지나갔는지 바퀴에 피가 묻었네, 등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씩 하셨지만 결코 잔소리는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불굴의 의지와 근면, 성실 하나로 치열하게 사셨지만 간암으로 칠순 다음해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한 나이보다 훨씬 많은 나이를 먹은 나는 지금도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게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아직도 작고 하찮은 것에 연연하고 감정 조절을 제대로 못하며 그릇된 판단을 하곤 한다.

이럴 때 아버지가 옆에 있다면 상의하고 논쟁도 하고 함께 고민하며 최선책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다. 누구나 그렇듯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에게 고마운 것만 생각나고 내가 잘못한 것만 생각난다. 조금 더 착하고 살가운 딸이지 못했던 것이 너무 후회스럽다. 나는 얘기 나누기 토론하기를 좋아했던 아버지와 대화하기를 꺼렸고 경험을 들려주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의 경험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일 뿐이라고 무시해버리곤 했다.

뒤늦게 깨닫고 후회를 하니 나는 얼마나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인간인가. 요즘처럼 즐거운 일도 별로 없고 제대로 되는 일도 별로 없을 때 아버지가 더욱 생각난다. 아버지의 면허증이라도 내게 남아있다면 작은 힘이라도 되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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