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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 연산군과 중종
풍향계 / 연산군과 중종
  • 신기원
  • 승인 2018.04.25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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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원(신성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

 

연산군과 중종은 이복형제이다. 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자식이지만 어머니가 다르고 시대적 상황이 다르다보니 행적은 상반되었다. 연산군은 억세고 자기주장이 강했던 생모 폐비 윤씨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공부는 그럭저럭하였지만 시와 그림을 좋아하고 노래와 춤 특히 처용무를 즐겼다. 그가 처용무를 추면 다들 넋을 잃고 바라보았고 죽은 자의 우는 연기를 하면 기생들도 모두 따라 울어 연회장이 통곡의 자리로 바뀌곤 하였다고 하니 예술가 기질이 풍부하였던 것 같다. 또한 야외나들이와 사냥을 즐겨서 궁성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금을 그어 왕 전용지를 만들고 그곳에 각종 동물을 잡아들여서 동물원을 꾸민 후 사냥을 하는 등 왕권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사용하였다.

연산군은 웅장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여 후원을 단장하는 것은 물론 새로 짓는 이궁의 정전을 청기와로 덮게 하고 규모도 크게 지었으며, 기생은 물론 궐 안의 노비들도 깨끗한 옷을 입도록 하였다. 또한 각종 연회를 열기위해 서총대를 축조하였으며 망원정을 헐고 이천 명이 앉을 수 있는 초대형 정자를 지으려고 하였다. 연회규모도 대단하여 광희라 불린 악공을 천명으로 늘리고 기생도 천명으로 늘리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채홍사를 전국으로 보내 고을 전속의 기생이나 첩을 뽑아왔다. 이렇게 팔도에서 뽑혀온 기녀들을 운평이라고 하였으며 이들은 다시 왕의 사랑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천과흥청, 반천과흥청, 지과흥청으로 나뉘었다. 천과흥청의 위세는 대단하여 사저로 나들이할 때면 도승지와 좌승지가 앞에서 인도하고 선전관과 감찰이 뒤를 따랐다니 문무백관들은 그저 하수인에 불과하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연산군이 연회 공간으로 활용한 곳이 세종 때 한글창제의 중요한 터전이 되었던 집현전과 세조가 증건한 원각사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짐은 일찍이 왕에 대한 견제장치였던 사간원과 홍문관을 폐지하고 사헌부를 축소하며 내관과 조관에게 신언패를 차도록 하고 대신들의 사모(관모) 앞뒤에 충성을 새겨서 쓰도록 할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추는 사례의 끝장은 자신의 가마꾼으로 유생을 쓰다가 급기야 하급문신에서 대간들까지 쓴 것이다. 백성들의 생활안정이나 부국강병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이러한 폭압은 결국 백성과 신하들에 의해 전복될 수밖에 없었다.

중종은 부드럽고 순종적이었던 생모 정현왕후 윤씨의 영향과 천성적으로 나약하고 공포심이 많은 성격 그리고 반정세력의 위세로 인하여 연산군과 반대로 행동하였다. 즉 검소한 생활을 솔선수범하였으며 부지런하고 성실한 자세로 학문에 열중하였고 구언의 전교를 하는 등 신하의 말을 경청하고 ‘내 탓이오’라며 몸을 낮추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대군시절부터 비롯된 연산군에게 죽음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본인이 반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데서 연유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광조 등을 활용하여 반정세력을 제거하고 남곤 등을 이용하여 조광조를 사사하게 한 것이나 김안로를 중용하여 남곤 김정 등을 숙정한 것 그리고 윤원로형제 등을 통해 김안로에게 사약을 내린 것을 보면 그 또한 백성들의 안녕보다는 왕권확립에 최우선목표를 두었던 것 같다. 39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재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것도 정종의 머릿속에 국태민안이나 부국강병이 아니라 왕조유지나 왕좌유지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도자는 성실하고 부지런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조선 최초의 반정으로 쫓겨난 폐주 연산군과 왕에 오른 중종의 삶은 대조를 이루지만 역사적으로 큰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시대상황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리더십 부족 때문이기도 하다.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려는 배려심과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보니 백성들에게서 버림받았고 역사의 냉엄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정권은 유한하고 민심은 천심이라는 진리를 조금이라도 깨우쳤다면 그들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는 연산군과 중종의 삶을 통해 지도자들이 눈앞의 현실에 집착해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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