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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 고령화 시대에 고령자를 생각한다 – 한·일 학자들의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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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장미
  • 승인 2018.06.24 2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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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끝인가? 토호쿠대학(東北大學) 교수 모리 이치로(森一郞)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죽으면 끝'과 '세계의 끝'

돌이켜 보면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친 지 사반세기(四半世紀) 이상이 지났다. 나의 수업은 자기 관심이 가는 대로 니체(1844-1900)나 하이데거(1889-1976)의 사상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고,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 삶은 끊임없이 '죽음이라는 끝'을 사는 것이라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죽음'이라는 예사롭지 않는 낱말이 수업 중에 난무하게 된다. 매번 학생에게 감상을 쓰게 하고 있는데, 몇 년 전부터 학생의 코멘트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자주 나타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으면 끝이니까….”

이렇게 쓰는 학생들은 결코 자폭자기가 아니라, 수업 내용에 대해서는 오히려 민감하게 반응해 주는 성실한 학생들이다. 이 말투에서 엿볼 수 있듯이 '죽으면 끝'은 그들에게는 말하자면 기정의 사항인 것이다. “죽으면 끝이니까 살아 있는 동안 열심히 사는 것이 소중하다”라고 그들은 갸륵하게 스스로에게 훈계하고 있다. 그것이 그들 나름대로의 '적극적인 사고'이거나 '깨달음'이거나 하는 것 같다.

과연 죽음이라는 끝을 자각하는 것이 적극적으로 살기 위해 중요하다는 사상을 하이데거의 사색에서 도출하는 것 자체는 별로 잘못이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철학도(哲學徒)가 실존의 철학을 전개하게 된 배경에는 전대미문의 총력전에 의해 수많은 전도유위(前途有爲)한 청년들이 목숨을 잃은 현실이 '죽음에의 존재'라는 의식을 통절하게 느끼게 만들었다는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하이데거가 항상 중요시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기들 인간을 '죽어야 할 자들'이라 부르고 유한성이 각인된 삶의 특이성을 나타냈다. 또한 고대 로마 이래로 유럽에서는 '죽음을 잊지 말라(memento mori)'라고 중얼거리면서 인생을 즐기는 지혜가 전해왔다. 하이데거 자신은 원시 기독교의 그리스도 재림과 영원의 삶을 고대하는 종말론 사상을 다시 읽고, 그때마다 절박한 죽음의 가능성을 참아 이겨내면서 거기서 다시 돌이켜보고 온전한 삶을 살기를 선택할 '순간'을 묘사했다.

죽음을 스프링보드로 삼고 삶을 충실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점에서는 ‘죽으면 끝’ 논자에도 비슷한 점이 있다. 학생들이 자기 나름의 '메멘토 모리'의 실감에 따라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이라는 끝'을 안다고 착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사색은 역시 죽으면 끝이라는 식과 크게 다르다. 그럼 어디가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여기서 한 줄 보조선을 그어보자. '죽으면 끝'이라는 중얼거림과 더불어 한 가지 현대인이 즐겨 쓰는 말투가 있다. '세계의 끝'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 일본의 인기 음악 그룹 중 하나가 'SEKAI NO OWARI'(‘세계의 끝’이라는 뜻)라고 일컫는데 줄여서, '세카오와'라고 가볍게 불리고 있다.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 중 하나가 바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世界の終りとハードボイルド・ワンダーランド)라는 제목이다. 그 에피그램으로 1962년에 스키터 데이비스(Skeeter Davis, 1931-2004)가 노래하고 미국에서 히트를 친 '세상의 끝'(The End of the World)의 가사 한 구절이 쓰여 있다. 일본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의 끝'이라는 주제를 여러 가지로 변주한 노래와 소설과 SF과 영화와 게임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끝'이라는 사랑받는 테마와 '죽으면 끝'이라는 더 하나의 애용구. 이것을 실마리로 현대인에게 특유인 이 콤플렉스(복합관념)를 풀어보기로 한다.

●'죽음이라는 끝'을 어떻게 풀 것인가?

우선 하이데거의 사상을 참조하면서 생각해보자.

하이데거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은 우리 각자가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고 그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를 파헤치는 탐구의 책이다. 그러한 각자의 삶 또는 '실존'이 죽음이라는 끝에 내밀리고 있는 것을 '끝에의 존재' 또는 '죽음에의 존재'라고 부른다. 그와 같은 죽음의 모습은 '가능성'으로 드러난다. 즉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언제든지 올 수 있는, 자기 존재가 끝날 가능성에 노출되면서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무의 테두리에 박힌 자신의 실존 가능성 속에서 그때마다 상황에 맞는 행위를 선택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죽음에의 선구(先驅)'라고 명명되고 실존의 본래 모습이 된다고 한다.

그럼 이 선구에 대해 '세계'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죽음이라는 자기의 극한적 가능성을 앞에 두고 불안을 느낄 때, 세계내존재의 단절 없는 일상성은 실효(失效)되어서 자기에게 다시 던져져서 고독하게 되고, 세계는 한꺼번에 '무의의성'의 양상을 보이게 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것뿐만 아니라 '세계의 무(無)'가 드러나게 된다고까지 말한다.

그렇다면 죽음에의 선구에서는 세계가 끝을 맺고 모든 것이 허무하게 되는 것일까? 다시 말해 하이데거에 있어서도 '죽음이라는 끝'은 '세계의 끝'과 결합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무의의함이라는 용모를 띠고 있어도 세계는 결코 사라져 없어지지 않고 세계내존재는 모두 계속 그대로 있다. 아니, 오히려 그 안에 존재하는 각자를 훨씬 벗어난 모습으로 세계가 바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 '죽음이라는 끝'을 어떻게 푸느냐가 관건이다. '죽으면 끝'이라고 할 경우 거기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계는 끝나고, 무로 돌아간다. 이것에 대해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이라는 끝'은 자기 가능성을 한계 짓는 것이긴 하지만, 타자의 존재 가능성까지 없애는 것은 아니다. 그와 정반대이다. 자기 권능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지 못한 것이 저편으로 엄연히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죽음이라는 한계를 가능성으로 유지하는 것에 속한다. 세계는 세계내존재 하는 각자에게 있어서 자기 것이면서 자기가 아닌 것이며 자기 자신을 능가하는 무언가인 것이다.

실존이 한계를 가지는 것과 세계가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양립한다. 자기 존재에는, 자기를 뛰어넘는 것이 곁에 존재하고 그것과 갈등해야만 자기 존재의 전체성도 비로소 성립된다고 하는 사상이 여기에는 있다.



●유한한 자기와 세계의 초월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라는 생각은 현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한편 자기존재, 특히 자기의 죽음에 중점을 두는 사고방식에는 다른 것과의 관계가 결여되고 타자의 존재를 가벼이 여기고 있다는 비판도 받아왔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세계' 개념에는 자기 속의 자기가 아닌 것이라는 외부에 열린 사상이 흘러넘치고 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끝'에 대해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가장 고유하고 몰교섭적(沒交涉的)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으로 규정한다. 특히 죽어가는 존재의 본래 모습인 '선구'(先驅)에 대해서는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이 나의 개별성이 드러난다. 그럼 거기서 타자와의 관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자기 가능성이 사라져 없어지는 점인 죽음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그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 타자의 실존 가능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타자 자신의 실존 가능성을 자기 쪽에서 마련해 준다고 하는 오만함은 부셔지게 된다. 왜냐하면 타자는 어디까지나 나의 실존 가능성과 독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며, 나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없어지기는커녕 그것을 잔혹할 정도로 밟고 넘어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타자의 실존 가능성에 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인 죽음을, 그러나 타자는 쉽게 뛰어넘는다. 이것은 별로 어려운 말이 아니라 각각의 죽어가는 존재들로 이루어진 세계내 공동존재의 복수성(複數性)을 나타내고 있다. 알기 쉬운 예로는 세대의 현상이 있다. 부모의 죽음을 딛고 아이는 살아간다. 구세대를 딛고 신세대는 앞으로 나아간다. 자기 속에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 생기고, 그것이 자기를 대신한다. 그렇게 해서 세계는 변함없이 이어져 간다. 세계는 완고한 지속성을 가진다.

세계내존재라고 할 경우의 '세계'는 타자와 함께 나누어진 공동세계이며, 게다가 동시대인에게 공유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를 달리하는 사람들과도 공유되고 있다.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 장래의 사람들을 우리와 맺는 것, 그것이 바로 세계이다. 같은 하나의 세계에 시대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그때마다 거기에 사는 식으로 세계는 공유된다.

'세계'라는 말은 '우주'와 마찬가지로 한없이 광대한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세계내존재'란 광대무변인 세계에 열려 있고, 그 안에 나선다는 의미인 것이다. 세계에는 세속 ・ 세간 ・ 세상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세계내존재'에는 '세속내존재'라는 의미도 있다. 이런 경우의 '세상'도 자기만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며, 개개인의 기대 따위는 금방 날려버리는 폭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된다. 세계는 나의 죽음으로 갑자기 끝나버릴 정도로 유약한 것이 아님은 물론, 특정한 시각에서는 아무리 가로막힌 것처럼 보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끈질기게 계속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는 '초월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세계는 끝나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끝날 것 같이 보여도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생각이 여기에 이르지 않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끝'인 것이다. 나의 죽음을 뛰어넘고 이 세계는 확고부동하게 존속된다. 유한한 자기와 표리일체의 '세계의 초월'을 주제로 삼는 세계내존재의 철학은 '죽으면 끝'과 상반된 극을 이루는 사상인 것이다.



●무세계적(無世界的) 자아라는 아톰(원자)

 그것이 어떻다는 말이냐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언제나 어딘가에서 “죽으면 끝이야”라고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고, '세계의 끝'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하이데거의 견해 따위는 상관이 없는 것이고, '세계내존재'라고 해봐야 별로 고맙지도 않다고 말이다.

과연 '죽으면 끝'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는 젊은이들의 '깨달음'으로 유포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세계의 존속을 위협하는 현대의 풍토병으로 만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증오로 가득 찬 대량무차별살인의 범인이 자살하고 말았다면 더 이상 그 흉악범죄를 추궁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서 '죽은 자의 승리'라는 최악의 논리가 성립되고 만다. '죽으면 끝'이라는 중얼거림은 반드시 '그러니까 지금을 열심이 살자'라는 갸륵함에 도달한다고 말할 수 없고, '그러니까 무엇을 해도 괜찮다'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허무주의와 근접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생물이 마음속으로 절망했을 때, 무슨 일을 저지를지는 자살폭탄 테러리스트가 몸소 보여준다. 만약 그것이 국가 규모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상상도 현대 사람으로는 결코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과격한 형태가 아니더라도 자기 죽음이 모든 일의 종언으로 보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는 현대 세계에 음으로 양으로 퍼져가고 있다. 예를 들면 자기가 죽은 후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무덤을 지킨다는 관념은 무의미하다. 핵가족의 단위는커녕 '분할할 수 없는 것'(아톰)을 구현하는 단독자(單獨者)가 되는 것이 자유롭고 평등한 자연 상태처럼 여겨진다. 원자끼리 서로 결혼한다는 결합은 부자연스럽다고 한다면 그 결합에서 태어나는 다른 생명 따위는 비현실하기 그지없다는 말이 된다. 그리하여 비혼(非婚) ‧ 저출산 경향이 급속히 진행된다.

'죽으면 끝'이라고 깨달은 듯 중얼거리는 세대가 앞으로 결혼이나 생식에 더욱 소극해지고 '자신의 대로 끝나'는 경향을 조장하게 되는 것이 눈에 보이고 있다.

개인주의에 철저한 이와 같은 '원자화'(原子化)는 일시적인 유행 현상도 특정한 국민성에 유래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적으로 보아 일본과 한국에서 저출산 현상이 극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은—양육과 교육의 조건 정비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도 포함해서—근대라는 시대가 내포해온 근본적인 동향이 집중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바로 '무세계적(無世界的) 자아'이다. 순전한 나의 의식에 틀어박히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물론 최근의 발명도 아니다. 400여년이나 전에 데카르트(1596-1650)에 의해 제창된 순수이론이 어느덧 세상에 상식화된 것이다.

물론 근대의 이러한 주관 관념은 데카르트 혼자서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 이후 근대철학사의 소산도 아니다. 데카르트와 동시대에 일어난 거대한 사건, 즉 근대적 우주상의 성립이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나'로 틀어박히는 형태로 응축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그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지만 중요한 것은 근대적 사고방식의 밑바탕에 세계를 지극히 미세한 요소로 환원시켜서 완전히 설명하려고 하는 원자론적 발상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보다 개괄적으로 말하자면 유물론적 자연주의라는 말이 된다.

만물을 원자의 이합집산 운동으로 설명하는 근대적 자연관에서는 미적 조화를 이루어 온 '세계‘(코스모스)의 질서는 완전히 무너지고, 무차별하고 획일적인 보편적 '우주'(유니버스)가 밋밋하게 펼쳐지게 된다. 그 무한공간의 여기저기에 개인이 내던져지고 원자로써 떠 있을 때 우주 속에서 있는 그 자리는 완전히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어디에도 귀속하는 장소를 갖지 않는 '무세계적 자아'가 흩어져 있을 뿐이다.



●신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황량한 무한 우주를 헤매는 원자와 같은 근대적 주관이 기댈 곳 없음을 말한 니체의 글이 있다. 주요 저서의 하나인 '즐거운 학문'의 단편번호125 광인(狂人)이다. 니체가 남긴 글 중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이다. 거기에 등장하는 '광인'은 “신은 죽었다. 아니 우리 인간들이 죽인 것이다!”라고 외친다. “위도 아래도 없는 무차별 공간으로써의 우주에는 신에게 어울리는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지고 말았다. 거룩한 존재자를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것으로 말살시켜 버리는 만큼, 그렇게 엄청난 일을 근대라는 시대는 저질렀던 것이다”라고 말이다.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는 단지 기독교 신앙이 쇠퇴했다는 정도의 말이 아니다. 전통적 세계관이 뿌리째 무너지고 무세계적 자아가 그냥 떠 있는 허무공간이 펼쳐지고 있을 뿐이라는 근대적 우주상의 성립을 이렇게 말을 바꾸어서 표현한 것이다. 게다가 여기서 광인이 말했듯이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고 도중에 있다. 그것이 무엇으로 귀결하는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니체가 이 글을 짓고 나서 1세기 이상이 지난 후에도, 다시 말해 근대라는 시대가 400년간 계속된 오늘날에도 이 사건은 진행 중이다. 과연 니체가 광인의 입을 빌려 신비적으로 말한 '신의 죽음'은 현대인에게도 일반상식이 되어 있다. 오늘날 신이나 부처를 이야기할 여지 따위는 요만큼도 없는 유물론적 자연주의가 압승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죽으면 끝'이라는 식의 허무주의를 젊은이들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그따위는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름 아닌 니체가 예고하고 있다. 같을 '즐거운 학문'의 단편번호108 「새로운 싸움」이 바로 그것이다.

비교적 짧은 이 글에도 '신은 죽었다'라는 말이 나온다. 아니, 오히려 이 108번이야말로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적은 초출인 셈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붓다가 죽은 후, 몇 백 년 동안 '붓다의 그림자' 즉 그의 거대한 영향이 지상에 계속 남았다. 그렇다면 그것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훨씬 강렬하게 신이 죽은 후 '신의 그림자'는 아마도 몇 천 년 규모로 이 세상에 계속 남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죽으면 끝이라고 중얼거리는 현대의 순진한 무신론들은 “니체가 말한 것처럼 신은 죽었으니까 그 문제는 이미 끝났으니 생각해 봤자 소용이 없다“고 그냥 넘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위대한 인물의 영향은 죽은 후에야 본령을 발휘하는 것처럼, 신도 역시 죽은 후에야 그 절대적 영향력을 인류에게 계속 행사한다고 니체는 말했다. 인류가 신을 죽이고 종래의 세계관을 대신하는 새로운 우주상을 유포시키는 것은 수백 년 정도가 아니라, 몇 천 년에 이르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다. 그러니까 '여파' 정도의 쉬운 일이 아닌 '본격적 쓰나미'가 이제부터 밀려온다고 보아야 될 것이다.

인류는 온 힘을 다하여 신을 죽였고, 지금까지 400년에 걸친 새로운 시대를 구축해 왔다. 그 과정 전체를 '근대'라고 부른다면 과연 그것은 거대한 전환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결코 움직이지 않을 줄로만 알았던 대지는 우주공간을 헤매는 혹성인 지구가 되고, 그 주민도 또한 진공을 떠도는 뿔뿔이 흩어진 원자가 되었다. 이 과정을 맨 먼저 알아차린 철학자가 무세계적 자아의 기초를 닦은 것이 그 후 조금씩 인류의 표준이 되었다. 이 일련의 과정의 맨 끝에 위치하는 것이 현대의 우리들이지만 그것도 역시 과도 단계에 지나지 않고 종래 이상의 대전환이 더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신도 죽으면 끝이 아니다, 라고 말이다.



●세계는 끝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세계의 끝'이라는 관념에도 다른 각도에서 빛을 비출 수 있다.

원래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세계관이 종언을 맞이했다는 점에서는 세계는 이미 끝났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조잡한 파악이 아니라 좀 더 현대인의 실감에 가까운 데에서 생각해 보자. 우리 현대인이 '세계의 끝'을 무의식 속 어딘가에 입력되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물어 보자.

과연 세계의 끌이라는 관념에 인류는 옛날부터 사로잡혀 왔다. 기독교의 종말론 사상도 그렇고, 불교의 말법사상도 그런 부류이다. 하지만 “말세로다…”라는 식의 쇠퇴사관과 완전히 다른 유형의 '세계의 끝'이 20세기 중반 이래 인류에게 임박하고 있는 것도 역시 분명하다. 그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핵전쟁에 의한 인류 멸종의 가능성이다.

20세기 전반에 급속히 진전된 원자핵물리학과 원자폭탄의 개발 ・ 제조 프로젝트는 17세기 이래 근대 자연과학의 일대 성과이며 인간의 지혜의 승리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신의 사후에 지상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짙은 '신의 그림자'를 거기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단계에서 모든 인류는 사이좋게 '멸종에의 공동존재'가 되었다. 하이데거는 우리 각자가 '죽음에의 존재'라고 말했지만 지금 모든 인류가 자멸 가능성을 보류되고 있는 지구시민인 셈이다. 그러한 말세의 인기 아이템이 '세계의 끝'이라는 관념인 것은 당연하다고 하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끝나지 않는다. 21세기는 그 초두에 일어난 엄청난 테러 사건 이래로 세계가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는 양상을 보여 왔지만 그 위기를 내포한 채 구태의연하게 이어지고 있다. 2011년 3월에 일본을 휩쓴 대지진은 하마터면 동일본이 괴멸될 뻔했는데, 불과 수년만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전 재가동이 잇따라 감행될 형편이다. 세계는 끝날 것 같으면서 끝날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류가 20세기에 세계대전의 참화와 그 다음으로 이어진 동서냉전의 공포를 겪어왔다는 실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끝날 것만 같았던 생지옥이 전개되었음에도 이 세상은 계속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그럴 리가 없는데—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의 영속성'이라는 일의 또 하나의 측면에 다시 만나게 된다. 죽으면 끝이라고 중얼거리는 젊은이가 아무리 많이 나타나고 세계의 끝이라는 이미지가 아무리 인기를 끌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근대라는 과격한 시대의 실험장과 같은 극동의 나라들에서 저출산 ‧ 고령화가 아무리 심각해지더라도 그래도 이 세상은 계속된다.

'세계의 영속성'의 수수께끼야말로 참으로 묻고 사색할 만한 일인 것이다.

번역 야규 마코토(원광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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