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김득진 기자) 이름만으로도 부담 백배인 체 게바라, 흔적이나마 쫓으려면 몸을 혹사시켜야 맘이 가볍다. 택시를 마다하고 두 시간 기다린 뒤 시내버스에 올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 틈에 낀 게 그토록 편할 줄이야. 터미널에 도착해서 시간표를 봤더니 버스는 세 시간 뒤에 출발한다고 적혀 있었다. 비아술 버스가 뜸한 건 체 게바라가 쉬 다가오는 걸 거부해서인 것 같다. 티켓 끊은 뒤 대합실에서 죽치다가 산타클라라행 버스에 올랐다. 막연한 기대 땜에 백팩은 빵빵해졌고, 버스는 그가 뿜어낸 자장의 힘으로 매연과 먼지 풀썩거리는 길을 내달렸다. 오월의 고속도로는 몽환적인 풍경 만들려고 아지랑이를 자욱 품은 채 참배객을 맞아들였다.

체 게바라를 처음 만난 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영화에서다. 의과대학 다니던 23살의 그가 생화학도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오토바이 여행하며 벌어지는 일을 다큐멘터리로 재구성했고, 스페인 식민 통치를 겪어 피폐해진 라틴 아메리카를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그렸다. 그러는 동안 체 게바라는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민족을 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환자촌에서 의료봉사를 하던 중 간호 수칙인 장갑 끼는 것조차 거부하고 그들과 축구한 뒤엔 서로 껴안기도 했다.

멕시코 아스카 문명이나 칠레 마야 문명, 그리고 페루 잉카 문명이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다는 걸 알고 있는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을 성공 시킨 뒤 피델 카스트로가 내 준 권좌를 물리친 채 편지 한 통만 남기고서 또 다른 혁명의 길로 접어들었다. 길이 체 게바라를 만들었고, 체 게바라는 길이 되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지는 것도 그런 탓이다. 신제국주의에 핍박받는 볼리비아를 해방시키겠다는 일념으로 혁명 전선에 뛰어들었다가 1967년 10월 미국 CIA 사주를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에 잡혀 총살당했으니 라틴 아메리카를 떠도는 콘도르는 그의 영혼이라 부르는 게 옳다.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죽었지만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는 그가 설립한 산티아고 데 쿠바의 약물학교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못다 이룬 체의 꿈을 펼치려 애쓰다 친구 곁으로 떠나갔다.

네 시간 걸린다는 버스가 산타클라라 터미널에 도착한 건 다섯 시간 만이다. 어딜가나 요금이 만만찮은 택시여서 주위를 서성거리던 네 사람을 끌어 모아 체 게바라 기념관으로 향했다. 저만치 우뚝 선 체 게바라 동상이 보여 광장에 내려 선 순간, 찌는 듯한 더위가 지친 발목을 친친 휘감았다. 경치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건 지진운 속을 유유히 날아다니는 솔개떼다. 높게 뜬 맹금류는 쿠바노의 자존감을 지켜 준 영웅을 돌보려고 날아든 용병이 틀림없다. 목을 꺾어 올려다봐야 하는 체 게바라 동상은 25미터 높이여서 어지간한 거리에선 아랫부분 밖에 보이지 않았다. 짙은 구름이 끼다가도 고개를 들면 햇살이 시야를 가로막았고, 동상을 둘러막은 야자나무를 피해 관람 위치를 잡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가까스로 찾아낸 뷰포인트에선 정작 체 게바라의 모습이 작달막하게 보였다. 그의 자태를 가까스로 포착한 순간 층을 이룬 구름의 무리가 동상을 에워쌌다. 영웅의 오래된 상처를 겹겹이 에워싸려는 듯 구름이 퍼포먼스 펼치는 게 눈부셔 고개를 숙였다. 기단에 조각된 글씨는 역광 때문에 쉬 읽기 어려웠다. 한 곳에 초점을 맞추면 다른 곳이 흐려지고, 다른 포인트를 잡은 순간 배경이 허술해지며 조각된 글씨를 뒤덮어버렸다. 기단과 동상 전체를 카메라에 담는 건 글렀다는 생각에 어깨를 늘어뜨리고 영웅이 드리운 숭고한 그늘로 몸을 숨겼다.

쿠바 어딜 가더라도 마주치는 게 체 게바라지만 산타클라라는 오롯이 체(Che)의 도시라 칭하는 게 옳다. 교통의 요지인데다 철도의 교착지이기도 하지만 체 게바라가 정부군 전의를 꺾은 혁명의 중추 도시로 더 알려졌다. 시가지 중심에는 전적지인 비달광장이 마련되어 열차 탈취하기 위해 썼던 불도저며 선로 이탈한 화물열차가 유물처럼 전시되어 있다. 인근 공장 굴뚝에도 포탄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지만 시가지는 가족과 연인, 주말을 즐기러 온 사람들의 눈부신 웃음 덕분에 환하다. 동지며 친구라는 뜻이 담긴 체, 미소 띤 채 시가를 문 베레모의 혁명가는 젊은이들의 우상이기도 하다.

기념관 둘러보려고 광장 뒤편으로 접어들었다. 관리인이 돈이며 여권이 든 크로스백까지 맡겨야한다고 근엄하게 말했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볼리비아에서 전사하기까지의 사진들이 전시된 기념관을 빼 먹어선 안 된다는 뜻이다. 피델을 비롯한 여럿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 마에스트라 산악을 누비며 전투를 벌이던 틈틈이 펼쳐보곤 했을 녹색 노트 속 69편 시는 체 게바라 미소 띤 모습을 복기하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뒤 떠나간 체 게바라를 기리기 위해 피델 카스트로가 세운 청동상은 쿠바인들의 가슴 속에 곧고 환한 길을 만들어 준다. 군복차림으로 팔에 깁스를 한 채 총을 든 그의 동상 아래 꽃을 바치고 우러러보는 눈길마다 경외감 그득한 게 그걸 증명한다. 쿠바를 혁명의 반석 위에 올려두고 볼리비아에서 죽어간 그는 라틴 아메리카를 아우르는 신화로 남겨져 하늘 높이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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