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비밀을 찾아 떠나는 여행

가을로 가는 길, 좌구산 입구

가을엔 걷는 거야. 숲길, 물길, 들길, 골목길을 걷는 거야. 들숨과 날숨으로, 씨줄과 날줄로 걸으며 자연을 품는 거야. 가을엔 젖는 거야. 풍경에 젖고, 그리움에 젖고, 사랑에 젖고, 달콤한 꿈에 젖는 거야. 젖으며 익어가는 거야.

가을엔 물들고 스미는 거야. 바람에, 햇살에, 흐르는 물살에, 그리고 시심에, 돌아오지 않을 추억에 물들고 스미는 거야. 그리하여 가을엔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거야. 노래하는 거야. 삶의 향기 깃드는 거야.

안개 낀 가을의 출렁다리
안개 낀 가을의 출렁다리

콧노래를 부르며 좌구산을 오른다. 도시 인근에 이토록 험준한 산이 있다니, 숲 속에 휴양림과 천문대와 출렁다리와 거북이 이야기 등 수많은 스토리텔링이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폭포가 있고 소나무 잣나무 자작나무 등의 군락지가 있으며 가면서 쉬면서 시심에 젖고 풍경에 젖는 무위자연의 즐거움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좌구(坐龜)산은 말 그대로 거북이가 앉아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산이다. 한남금북정맥의 최고봉(657m)이다. 토끼와 거북이가 이 산에서 달리기 시합을 했다. 토끼는 늘 다니던 산이고 길이니 여유만만이었다. 먹고 놀며 아름다운 풍경을 품고 한 숨 자고 일어나 보니 거북이가 정상에 먼저 도달했다. 사실 거북이는 토끼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무겁고 둔한 걸음으로 산의 정상을 오르고 싶었다. 정상에서 보이는 새로운 세계가 되우 궁금했다.

정상에 오르니 풍광이 일품이었다. 저 멀리 푸른 호수가 있고 황금들녘이 기막히게 아름다웠다. 하늘에는 구름한 점 없다. 숲속에서 소꿉장난하던 바람들이 숲의 비밀을 하나씩 풀어놓고 있었다. 꽃과 나무와 새들의 이야기였다. 그렇다. 산다는 것은 만남이다.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다. 매 순간이 앙가슴 뛰는 축복이다.

좌구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숲의 비밀을 품고 하산한다. 느림의 미학을 즐기거나 숲속의 보물찾기를 하거나 쏟아지는 계곡물에 등목을 한다. 휴양림에서의 하룻밤 달달한 추억도 담는다. 무수히 쏟아지는 별들을 품고 달그림자 여행을 한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며 새로운 돋음을 준비한다.

좌구산 정상의 천문대
좌구산 정상의 천문대

알퐁스도데의 <별>을 생각하고,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노래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별자리 여행을 떠나자. 홀로의 자유에 목마른 사람도 괜찮다. 좌구산에 있는 천문대에는 356mm의 국내 최대 굴절망원경이 있어 선명하게 천체관측을 할 수 있다. 10m의 반구형 천체 투영실에서 누워 밤하늘의 별들을 구경할 수 있다. 별을 사랑해 별지기가 된 가이드와 함께 별에 대한 애틋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러니 밤하늘의 별 하나를 가슴에 품어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 나만의 별을 만들자.

좌구산에는 소나무, 잣나무, 자작나무 숲의 군락지가 있다. 천문대 바로 옆에는 40m 높이의 푸른 잣나무 수백그루가 빽빽이 서 있다. 직립의 미학이자 무념무상의 공간이다. 쏟아지는 바람과 햇살과 자작나무의 진한 향을 온 몸으로 느낀다. 명상을 해도 좋고 책을 읽어도 좋고 오순도순 모여앉아 수다를 떨어도 좋다. 자연은 이 모든 행위를 기꺼이 허락한다. 어느새 몸도 마음도 잣나무 향으로, 삶의 도파민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지의 여행을 떠난다. 숲속에서는 누구나 노래하는 악동이다.

좌구산 휴양림의 벚꽃시즌
좌구산 휴양림의 벚꽃시즌

잣나무 숲에서 북쪽으로 오름의 길이 있다. 좌구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좁고 비탈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땀방울 가득하다. 산 정상 주변은 수백 년 수령의 소나무 군단이 도열해 있다. 일제 강점기에 놈들이 이곳까지 올라와 송진을 착취해 갔다. 소나무 허리에 도끼자루 가득하다. 그 상처를 딛고, 북풍한설을 딛고 견뎌왔다. 견딤이 쓰임을 만든다고 했던가. 견뎠기에 더 푸른 기상을 자랑한다. 내가 너를 지키지 못했는데, 너는 스스로 견디며 강건하게 서 있구나. 사사로운 것에도 상처를 받고 쉽게 무너지는 인간의 삶이 부끄럽다.

바람소리길은 천문대와 숲속의 집 삼림욕장을 잇는 산책로다. 꽃과 나무와 쉼터가 옹기종기 모여 있어 마음치유하기에 좋은 곳이다. 자작나무 숲은 겨울에 더욱 도드라지고 어둠속에 더욱 빛난다. 자작나무의 사촌격인 거제수나무와 사스래나무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자작자작’, ‘사각사각’… 낭만의 숲,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 보자.

하산하는 길에는 명상구름다리를 걸어야 한다. 50m의 높이에 230m에 달하는 길이의 구름다리를 걸으면 하늘과 숲이 맞닿아 있는 느낌이다. 삶의 아찔함에 현기증이 난다. 저잣거리로 되돌아갈 생각을 하니 몸과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래도 가야한다. 운명이다.

좌구산 정상의 천문대 조형물
좌구산 정상의 천문대 조형물

글 변광섭 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사진 송봉화 한국우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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