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임진왜란 때 내륙에서 첫 읍성 탈환 승전보가 울려 퍼졌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전국 곳곳을 유린하던 1592년 8월. 조선 중기 문신인 조헌은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 대사 등 승병과 합세해 청주읍성을 탈환했다.

1592년 5월 바다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순신 장군의 옥포해전에 버금가는 승전보였다.

그러나 일제가 강점기 초기에 도시 정비 등을 이유로 청주읍성을 헐어내는 만행을 저지른지 올해로 107년이 됐다.

읍성 남문을 나와 무심천을 건너던 돌다리 남석교도 1936년 땅에 완전히 묻혔다.

일제가 무심천 자리에 제방을 세우면서 매립된 남석교는 당시 시멘트가 다리 위에 부어졌고 이후 육거리시장이 다리위에 형성되면서 자취를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다행히 2013년 12월 읍성 일부 구간이 복원됐지만 원래의 모습은 기록과 사진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청주읍성의 축조시기를 다룬 문헌 자료는 없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역사서에는 청주읍성의 규모가 높이 13척(1척 31cm), 둘레 5443척으로 기록돼 있다.

1910년 충북도청 장관으로 부임한 일본인 스즈키는 '시구개정'(市區改正)이란 명목으로 시가지 도시 정비사업을 추진하면서 1911년 4월부터 1914년까지 읍성 철거를 감행했다.

사방의 성벽을 헐어 그 성돌로 하수구 축대를 쌓고 남문에서부터 북문까지 이어진 간선도로와 지금의 성안길을 만들면서 청주읍성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청주시는 땅속으로 사라진 남석교에 대한 구조진단을 위해 내년에 사업비 2000만원을 들일 예정이다.

2004년엔 길이만 확인했다면 이번에는 구조물에 대한 안전진단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한범덕 청주시장은 조선시대 청주목사가 근무했던 관아건물인 청주동헌 청녕각과 KT건물 일부 공간을 매입해 중앙공원까지 연결하는 ‘관아공원’ 조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 사업을 위해서는 현재 2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청주동헌을 둘러싼 옛 청원군청을 철거해야 되지만 통합시청사가 우선 완공돼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옛 청주읍성과 남석교 등 역사유물 복원사업이 아이러니(irony)하게 통합청주시청사와 육거리시장이란 현대 유물에 제대로 발목이 잡힌 것이다.

과연 미래세대를 위해 청주시가 무슨 답을 제시할지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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