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용 전 금강유역환경청장

이경용 전 금강유역환경청장

(동양일보) 내 아내는 알뜰하다. 무엇이든지 함부로 낭비하거나 버리지 않는다. 결혼한 지 24년이 되었다. 그 동안 9번 이사를 하였다.

그런데 아직도 결혼할 때 마련한 장롱을 가지고 다닌다. 장롱 속에는 결혼 예단용 이불세트를 포함해 족히 10명 이상이 깔고 덮을 수 있는 이불이 있다. 사용하지 않는 이불이 대부분이다. 내가 보기에 사용하지 않는 이불이 더 비싸고 좋아 보인다. 매일 덮는 이불은 서너 장에 불과하고 막 다루기 쉬운 평범한 이불이다. 그나마 장롱에 들어 갈 공간이 없어 방 한 켠에 쌓아둔다.

옷장이라고 별반 다를 게 없다. 고가이고 좋은 옷일수록 아껴 입다 얼마 입어보지도 못하고 유행이 바뀌거나 체형이 바뀌어 그냥 옷걸이에 걸어둔 옷이 수두룩하다. 얼마 입지 않았으니 아까워 버리지도 못한다. 며칠 전 아들에게 흰색 파카를 사주었다.

새 옷을 받은 아들이 기뻐하며 입고 나가려 하자 아내가 한 마디 내뱉는다. “쓸데없이 왜 아무 때나 새 옷을 입니”. 한창 크는 고등학생이니 저 옷도 몇 번 못 입고 옷장에 장식용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지난 주에는 아파트 관리실에서 우리 집 난방장치를 점검하러 나왔다고 한다.

한 겨울인데 우리 집의 난방량에 변동이 없어 혹시 난방 계량기가 고장인가 보기 위해서란다. 점검결과 난방 계량기는 이상이 없었다. 그러면서 이 아파트는 설정온도가 25도는 돼야 난방장치가 돌아간다고 하더란다. 아내 왈 “방바닥 만져 보세요. 따뜻하잖아요. 21도면 충분하지 25도는 너무 높아요”라고 하고 돌려보냈단다. 실제 우리 집은 춥다. 내복을 입고 있어야 한다. 그나마 문과 창을 방풍지와 방풍커튼으로 꼭꼭 틀어막아서 이 정도를 유지한다.

내 아내가 유별난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유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교육 받았다. 그리고 이를 열심히 실천하다. 이솝 우화의 개미와 베짱이가 주는 교훈이 그렇다. 당장은 고생이 되더라고 미래를 준비해야 겨울날 추위에 떠는 베짱이 신세를 면할 수 있다는 경고를 가슴에 새기고 산다. 여름날의 햇살을 즐기며 노래를 사랑하는 베짱이를 한심하게 여긴다. 겨울에 먹을 낟알을 열심히 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모세대가 아이들에게 하는 가장 흔한 조언이 무엇일까? 나는 단언컨대 “공부 열심히 해라. 그래야 나중에 후회 안 한다”일 것이라고 본다. 미래의 좋은 직장을 위하여 지금을 투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지금 힘들어도 미래에 찾아 올 행복이 기다리고 있으니 괜찮다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왔다. 고등학생일 때는 대학생이 되면 추억과 낭만이 기다리니까 하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취직만 하면 내 마음대로 할 거야 하고. 취직을 해서는 승진만 하면, 승진해서는 자식들이 잘 되면….

이렇게 우리 세대는 지금을 억제하고 다가올 미래의 행복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그런데 뒤 돌아 보면 불확실한 미래에 우리의 현재를 너무 많이 내어준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본다. 어쩌면 오늘 즐거움과 여유가 있어야 내일 보다 더 즐겁고 행복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지금부터라도 지금의 나를 좀 더 아끼고 사랑하자고 말하고 싶다.

내 아내도 그랬으면 좋겠다. 이제 이불도 좋은 것 덮고, 옷도 좋은 것 꺼내 입으며, 실내 온도도 좀 더 올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고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우리 아이들도 앞으로 다가 올 행복을 위해서가 아닌 배움의 기쁨을 아는 공부를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행복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지금에 충실하고 만족하면 나중에 후회할 일도 훨씬 줄어든다는 사실을 믿는다. 지금 최선을 다하였다면 결과는 그냥 미래에 맡겨두면 된다.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했는데 네가 나에게 그럴 수 있어 하며 타인을 원망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내가 치룬 희생에 비례하여 보상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좌절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는 애초부터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모두가 지금의 나를 좀 더 아끼고 사랑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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