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넘은 ‘통일된 민족문학사’에는 포석과 벽암이 상징적 존재

0일 오후 4시 진천포석조명희문학관 세미나실에서 개최된 8회 ‘포석 조명희 학술 심포지엄’.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남북한에서 잊혀졌던 포석 조명희(1892~1938)가 재조명될 수 있었던 데에는 조카이자 시인이었던 벽암 조중흡(1908~1985)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의견이 나왔다.

10일 오후 4시 진천포석조명희문학관 세미나실에서는 동양일보가 주최하고 동양일보 문화기획단이 주관, 진천군과 포석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8회 ‘포석 조명희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심포지엄에서 김성수 성균관대 교수는 ‘조명희와 조벽암-조명희 복권과 북한에서의 조벽암’을 주제로 한 발제에서 이 같은 의견을 냈다.

김 교수는 “포석에 대한 연구와 기념사업은 잘 되어 있지만 그의 존재를 알리는 데 공이 컸던 벽암 조중흡은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남북의 이념적 잣대를 넘어 ‘통일된 민족 문학사’의 기초를 다지는데 있어 포석과 벽암이 상징적 존재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조명희의 생애를 재구성할 때 월북 작가인 이기영, 한설야의 회상이 큰 몫을 하지만 조카인 조벽암도 적잖은 삼촌 회상기를 남겨 교차 확인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조선을 떠나 소련으로 망명한 포석은 비밀경찰 KGB에 체포돼 ‘일제 간첩’ 누명을 쓰고 1938년 총살당했다.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이주 정책과 맞물려 재소한인 커뮤니티의 정신적 지도자인 포석을 제거함으로써 강제 이주 정책에 대한 집단 반발을 억누르는 탄압정책의 일환으로 분석되고 있다.

김 교수는 “한국에서는 1988년 ‘월북작가 해금조치’를 통해 복권된 것과 달리 북한에서는 1945년 해방 이후 당시 행방불명 실종자 신분이었을 조명희와 그의 문학이 처음부터 높이 평가 됐다”며 “1956년 9월부터는 포석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어릴 적부터 삼촌 포석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조벽암이 1956년 문단 중심을 잡아 큰 역할을 했다고 봤다.

김 교수는 “<조선문학> 주필인 조벽암은 포석의 유작은 자신이 주재하는 대표 문예지에 몇차례에 걸쳐 소개했다”며 “이런 식으로 포석의 과거 행적과 러시아 망명 후 행적 및 문학작품을 반복적으로 소개해 근대문학사적 위상을 드높였다”고 주장했다.

일제 강점기 카프 활동 경력 등으로 미군정의 정치 탄압을 받은 조벽암은 북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고, 문예지 주간을 역임하며 조명희의 소련 망명 후 행적을 ‘복원’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에서의 조명희 복권은 1988년 해금조치 실시이후 관련 학계와 후손, 진천을 비롯한 지역사회에서는 완결 됐지만 일반인 독자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전국-한반도-유라시아 보편 지역성을 회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안타깝다”며 “또 ‘납·월북 작가 해금’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인식에서 벗어나 ‘납북·재북·월북·월남’ 작가의 존재와 작품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 분단 이전 문학을 온전하게 복원, ‘한겨레 디아스포라 문학’ 허브를 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의 발제가 끝난 후 김승환 충북문화재단 대표이사를 좌장으로 김명기 동양일보 편집부국장, 김주희 침례신학대 교수, 정연승 충북작가회의 회장, 한성숙 충북도립대 외래강사가 참여하는 토론이 이어졌다. 박장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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