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 논설위원/소설가

박희팔 소설가
박희팔 소설가

 

(동양일보) 옛날 정미소가 없던 때, 아니 있었어도 흔치 않아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 시골에선 아직도 예부터 하던 대로, 절구에 곡식을 찧어 속꺼풀을 벗기고 깨끗하게 했다. 이러는 걸 ‘쓿다’ 곧 ‘쓿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쓿은 쌀’ 하면 ‘쓿어서 곱게 된 쌀’을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곱게 ‘쓿은 쌀’ 이라 해도 ‘뉘’ 가 있게 마련이었다. ‘뉘’ 라는 것이, ‘쓿은 쌀 속에 섞인 벼 알갱이’ 인데, ‘뉘가 많이 섞인 쌀’을 ‘뉘반지기’라 한다. 그런데 이 뉘반지기 그대로 밥을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쌀밥이라는 것이 보리밥에 비해 그 영양은 차치하더라도 우선 씹히는 맛이 연하고 부드러워서, 오죽해야 ‘밭팔아 논 산다.’ 는 말이 나왔을까. 한데 이러한 쌀인데 뉘반지기 상태로 밥을 지으면 쌀밥의 지위가 많이 훼손될 뿐만 아니라 먹는 사람들의 불만으로 그들의 입에서 죽 끓는 소리가 나온다.

“아니, 기껏 쌀농사 지어놨더니만 웬 뉘가 이렇게 많아. 이건 보리밥보다도 못하니 원!” “이건 콩을 섞은 것두 아니고 수수쌀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일부러 좁쌀을 넣은 것두 아니고 도대체 무슨 쌀밥이 이래?” “여보, 벼를 더 쓿어야 될까벼 웬 뉘반지기가 이렇게 많어.”

해서 밥 짓는 아낙들은 절구에 볓 번이고 몇 번이고 곡식을 쓿는다. 그 중에서도 주로 벼를 절구에 넣고 뉘반지기가 없도록 찧고 또 찧는다. 아무리 남정네들이 거드는 디딜방아에 찧는다 해도 뉘반지기가 있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뉘의 완전해소는 안 된다. 해서 아낙들은 밤을 도와 늦도록 이 뉘를 고른다. 완전한 쌀밥을 짓기 위해서도 그러하지만 콩도 수수도 조도 그리고 참깨 들깨고 고른다. 이 시간에 남정네들은 일찍 잠에 곯아떨어진 이들도 있지만 동네 사랑방에서 이야기장단에 시간 가는 줄 모르거나 주막에 가서 탁주에 취해 주모와 희희덕대거나 또는 타짜들과 어울려 화투판을 벌이기도 하니 아낙들의 이러한 노고를 모른다. 그래도 아낙들은 낮일에 연장해서 눈을 비비며 하나하나 뉘를 골라낸다. 뉘가 하나라도 있는 것이 마치 내가 소홀했기 때문으로 여긴다. 아녀자의 도리로써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서다. 자식들이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일어나 어슴푸레 이를 목격한다.

“엄마, 아직도 안 자. 인제 그만 자!” “알았다. 그래그래, 어서 자 어서 자!”

구한 말 경복궁을 지을 때 자금이 달려 노역자나 노역한 병사들에게 임금조로 쌀을 주는데 그 책임자 되는 탐관오리가 무게와 부피를 늘리려고 모래를 절반 섞어 주었다 한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지만 그래도 아녀자들은 이를 물에 가라앉히고 키로 까부르는가 하면 체에 거르고 조리로 일어 내는 등 일일이 가려내어 밥을 지어냈다한다.

그러한데도, 남정네들이나 아이들은 혹이나 밥에 돌이 씹히거나 뉘가 보이면 아녀자나 엄마를 나무란다. “에잇 돌이 씹혔어!” 하곤 숟가락을 휙 내동댕이치든가, “웬 밥에 돌이 이렇게 많아. 도대체 밥을 어떻게 하는 거야!” 하곤 오만상을 찌푸린다. 그러면 아녀자들은, “어째 거기만 돌이 들어갔누. 그래도 예전 선대들의 돌밥 생각해서 참으시우.” 한다. 어째다 한 번 들어간 것 예날 구한말 때의 돌밥 생각해서 구구이 따지지 말고 가만있으라는 핀잔의 말을 에둘러 말할 뿐이다. 또 “엄마, 뭐 이런 게 많아. 이 까만 거 이거 씹히면 맛도 없고 찔겨서 뱉어버려야 해.” 하든가, “이거 쌀 쭉찡이 아녀. 왜 쌀밥에 이런 게 들어있어?” 하면, “그거 뉘라는 것이여.”하곤 상을 물린 후에 따로 앉혀 놓고 이 뉘에 대해 말해주곤, “뉘 집에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다 아는 시절엔 흔히 있었던 일이다.” 할라치면, “그때는 집집마다 그렇게 뉘가 많았어. ‘뉘 집에…하니 말여?” 하고 되묻는다. 그러면. “그 ’뉘‘는 ’누구의‘ 라는 뜻여 이 바보야.” 하고는 볼을 살짝 쥐어지른다.

오늘날에도 시골의 할머니들은 콩에서 수수쌀에서 좁쌀에서 그리고 참깨나 들깨에서는 허리를 굽히고 앉아 뉘를 골라낸다. 그래도 쌀에서 뉘를 골라내지 않고 조리에 일어서 밥은 짓지 않는 즉 뉘반지기 시대가 아니니 세상 참 좋아졌다고 한다. 그러는 얼굴에 그 시절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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