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양국이 끝내 서로 상대국을 우방국(백색국가) 명단인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기로 함에 따라 양국의 교역과 산업 생태계가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됐다.

일본이 수출 규제 대상을 3개 핵심소재에서 식품과 목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산업으로 확대한 데 이어 한국도 일본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겠다고 응수하면서 당분간 양국 교역은 꽁꽁 얼어붙을 전망이다.

특히 양국의 '강대강' 대치는 대외 불확실성을 확대하고 글로벌 밸류체인을 위협해 가뜩이나 8개월 연속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한국 수출의 부진 장기화를 초래할 것으로 우려된다.

이에 따라 관련 업계는 일제히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 신속한 대체 수입처 발굴과 주력 부품의 국산화율 제고에 전사적 역량을 쏟는 한편 대(對) 일본 수출 차질 가능성에 대한 점검에도 나섰다.


◇ 일본 2차 규제 단행…한국 주력산업·미래먹거리 겨냥
일본은 2일 각의(국무회의)를 열어 한국의 백색국가 제외를 골자로 한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개정안은 공포 후 21일 시행되기 때문에 이달 하순부터 한국은 더는 백색국가로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일본은 전략물자는 수출 시 개별허가를 받도록 하지만, 백색국가에는 '비(非)민감품목'의 경우 3년에 한 번 포괄허가만 받으면 되는 완화된 규정을 적용한다.

전략물자 1천120개 중 비민감품목은 기존 규제 대상이었던 반도체 3개 품목을 포함해 857개다. 백색국가에서 빠지면서 포괄허가에서 개별허가로 전환되는 품목이 3개에서 857개로 늘어나는 셈이다.

여기에 비전략물자 중에서도 일본 정부가 대량살상무기(WMD)나 재래식 무기에 전용될 수 있다고 판단되는 품목은 자의적으로 개별허가를 받도록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개별허가를 받는 데는 90일가량이 소요된다.

일본은 군사용으로 쓸 우려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 신속하게 허가를 내주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앞선 규제 대상인 3개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가 지난 한 달간 단 1건의 수출허가도 받지 못한 점을 미뤄볼 때 한동안 일본은 한국으로의 수출을 틀어쥘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가 반영된 지난 7월 한국의 대일 수입은 지난해 같은 달 대비 9.4% 감소했다.

일본은 비민감품목을 일일이 규제하기보다는 한국 입장에서 가장 아플 만한 업종을 골라 집중 공격할 가능성이 크다.

애초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리지스트를 1차 타깃으로 삼은 것도 한국의 주력산업인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에 필수적인 소재이자 대일 의존도가 높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다음 타깃은 공작기계, 정밀화학 등 대일 의존도가 높은 산업이나 한국이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키우는 전기차, 정보통신기술(ICT) 등이 될 수 있다.

전기차 배터리인 파우치형 배터리를 감싸는 필름은 상당 부분 일본산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자동차나 선박 등에 필요한 기계 부품을 만드는 정밀 장비인 공작기계 역시 소프트웨어가 주로 일본제품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방직섬유, 석유, 석유·정밀화학, 차량·항공기·선박 등 48개 품목의 대일 수입의존도가 90%가 넘는다고 분석했다. 공작·정밀기계 등의 일본산 부품은 전체의 30∼40%를 차지했다.

삼성, 현대차, SK, LG, 롯데 등 5대 그룹은 '비상경영체제'를 가동하고 대비책 마련에 나섰다.

◇ 일본 각의 의결 6시간만에 한국도 "日 백색국가 제외"
일본 정부가 이날 오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주재로 열린 각의에서 한국을 '백색국가' 명단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한 지 약 6시간 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우리도 일본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겠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고 밝힌 데 이어 일본의 '선전포고'에 사실상 전면전으로 대응하겠다는 '임전무퇴'의 결의를 확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정부가 대외적으로는 WTO 제소 등 일본에 대항할 조치를 취하면서 국내에서는 기업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세제, 예산, 제도 등의 지원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와 별도로 일본을 직접 겨냥해 '초강수'를 던진 셈이다.

특히 일본이 기존의 '안전 수출 통제를 위한 국가 분류' 내에서 한국을 하향조정한 것과는 달리 한국은 새로운 그룹을 만들어 일본을 '특별 관리'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일본 전체 수입에서 차지하는 한국 비중이 4%대로 높지는 않지만 석유, 가스, 무선기기 등 핵심 품목을 수출을 규제할 경우 일본의 타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점을 노린 것이다.

실제로 한국무역협회,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5개 경제단체는 이날 공동 발표한 '경제계 입장'을 통해 "일본 역시 한국이 3대 교역국이자 양국 경제가 산업 내 분업과 특화로 긴밀하게 연결된 점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피해가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부가 각종 기업 지원책을 내놓은 데 대해 환영하면서도 양국의 날선 대치가 날이 갈수록 첨예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특히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의 경우 대 일본 수출이 전체의 2%대에 불과하기 때문에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것'이라는 우려 섞인 전망도 나오는 분위기다.'

◇ 엎친 데 덮친 한국 무역…정부 "가용수단 총동원해 대응"
정부와 기업의 총력 대응에도 한국 무역과 산업에는 먹구름이 드리웠다.

한국 수출은 지난해 12월(-1.7%) 마이너스로 전환한 이후 지난 7월(-11.0%)까지 8개월 내리 하락세다.

대일 교역이 한국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국 대치가 장기화할 경우 대일 의존도가 높은 산업을 넘어 경제 전체에 심각한 부담이 갈 수 있다.

한일 간 상호 무역 규모는 1965년 수교를 맺을 당시 2억달러에서 2018년 851억달러로 연평균 12.1% 성장했다.

한국에 있어서 일본은 중국, 미국, 베트남, 홍콩에 이어 5위 수출국이자 중국, 미국에 이어 3위 수입국이다.

일부 품목의 대일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첫 수출규제 대상이었던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은 전체 대일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도 안 됐지만, 대일 의존도가 최대 94%에 달해 관련 업계에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현대경제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에 대한 수입의존도가 90% 이상인 품목은 48개에 달하며 이들 품목의 대일 총 수입액은 27억8천만달러이다.


업종별 대일 의존도는 방직용 섬유 99.6%, 화학공업 또는 연관공업의 생산품 98.4%, 차량·항공기·선박과 수송기기 관련 물품 97.7% 등이었다.

일본 의존도가 50% 이상인 품목은 253개, 대일 총 수입액은 158억5천만달러로 집계됐다.

하지만 대일 수입의존도가 높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일본에 한국이 중요한 수출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은 일본의 3위 무역 흑자국이다.

일본 내에서도 한국이 중국, 대만, 독일 등 대체 수입처를 찾고 국산화율을 높여 대일 의존도를 점차 낮춘다면 결국 화살은 일본 기업에 돌아올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부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삼아 한국의 소재부품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성윤모 장관은 "정부는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WTO 제소와 함께 양자·다자 차원에서의 통상대응을 강력하게 전개할 것이며 조기 물량 확보, 대체 수입처 발굴, 핵심 부품·소재·장비 기술개발 등을 위해서도 범부처의 가용수단을 총동원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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