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곳곳 길바닥에서 예술을 주워온 칠순 넘은 아티스트

 

청주시립미술관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밤의 심연’ 앞에 선 김주영 화가.
청주시립미술관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밤의 심연’ 앞에 선 김주영 화가.

 

미술대학 교수직 미련없이 버리고 꿈을 ­‘삶’으로 선택한 검은색의 예술가
인도·몽골·티벳·중앙아시아·시베리아 등 세계를 떠돈 노마딕 프로젝트

 

누구나 한번쯤은 버리고 떠나는 꿈을 꾼다. 그러나 아끼던 물건, 소중한 추억, 편안한 일상을 하루 아침에 버리고 떠나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이 생계를 책임지는 직업까지 버리는 일이라면 더더욱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런데 그 꿈을 ‘삶’으로 선택한 실천자가 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미술대학의 교수직을 미련없이 던져버리고 스스로 ‘위험한’ 길을 택해서 홀로 꿋꿋하게 걸어간 사람. 지구촌 곳곳을 떠돌며 길바닥에서 예술을 주워 온, 칠순이 넘은 노마드 아티스트 김주영(72)씨다.
청주시립미술관의 기획전 ‘놓아라’ 전시장에서 그를 만났다. 단발머리에 꾸미지 않은 민낯, 줄무늬티셔츠 청바지 차림의 그는 까칠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사람처럼 따뜻하고 편안했다.
“이리 들어와 앉아요.”
그가 안내한 곳은 전시 작품 ‘황토집, 그땐 그랬지’ 흙집 안이었다. 찢어진 출입문 안으로 낙엽이 깔린 바닥, 흙으로 만든 부뚜막과 솥단지, 어머니 것으로 보이는 저고리와 얼굴 부조, 에폭시로 만든 밥상이 보였다.


-작품 속으로 들어왔네요. 행복한 초대입니다.


“마음의 고향 같은 집이죠.”


-세계를 떠돌아도 고향은 역시 마음에 있나봅니다. 마음에 남아있는 어린 시절 얘길 듣고 싶습니다.


“진천이 고향예요. 아직도 삼수초, 진천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이 눈에 선해요. 공부를 잘 했어요. 장학금을 받았는데, 길바닥에 앉아서 온가족이 우산을 고치는 친구네를 보고 제 장학금을 그 친구에게 주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청주여고로 진학해서 처음으로 집을 떠났어요. 성공회 수녀원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학교 기억보다 수녀원 기억이 생생해요. 10시에 불끄고 자라는데 잠이 와요? 담요로 책상을 덮고 밑에 들어가서 촛불 켜고 소설책을 보았지요. 그러다가 한번은 불을 냈는데 수녀님이 괜찮다 그랬어요. 너그러운 용서에 놀랐고 감동했어요. 그 뒤 수녀님은 서울로 가셨다는데 아마 돌아가셨을 거예요.”


-학교시절 기억은 어떤지요.


“청주여고에 입학한 뒤 사춘기가 왔나봐요. 좀 삐딱했어요. 결석을 밥 먹듯 하는 나쁜 여학생이었지요. 딴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보니 성적도 입학할 땐 상위권이었는데 점점 떨어졌고요. 여고때 학생기록부를 보면 내성적이고 소극적이고 미술반이라는 것만 적혀있을 거예요. 아, 충청북도미술실기대회에 청주여고 대표로 나가서 최고상을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처음으로 제 존재가 교내에 알려졌죠. 교장선생님이 미술반에 오셔서 ‘김주영이 누구야?’ 하셨으니까요.”
그는 공부가 하기 싫었다고 했다. 학교를 왜 다녀야 하나? 회의가 일었고 그래서 고3때는 거의 학교를 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그를 붙들어준 것이 책과 그림이었다.
“담임선생님이 호출하면 어머니가 쫓아가 빌었지요. 그 덕에 졸업은 했어요. 제가 원래는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언니가 죽고 남동생만 하나 있었어요. 그래선지 엄마는 유독 자식교육에 관심이 크셨어요. 엄마의 채근 덕에 재수를 해서 홍대를 갔지요. 대학은 내게 또 다른 세상이었어요.”


-예술적 자아를 키우게 된 곳인가요.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해주었어요. 대학을 간 뒤엔 책만 읽었거든요. 학교에 큰 도서관이 생겼는데, 도서관장이 새로 오면 나에게 책이 어디 있는지를 물을 정도로 도서관에서 살았지요. 그리고 글쓰기도 좋아했어요. 대학생 글공모대회에서 소설은 떨어지고 논문으로 상을 받았죠. 또 학교 실기실을 너무 좋아해서 방학 때는 아예 실기실에서 살았어요. 제가 늘 실기실에 박혀있으니까 교수님 한 분이 출퇴근하실 때마다 들여다 보셨는데 좋은 인연이 되었어요. 송재만 교수님이라고 같은 충북분이시고 송시열 선생 직계 후손이셨어요. 후에 안 일이지만 소설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주인공이셨다시더라고요. 교수님이 저를 다르게 보시고 대학원 때 홍익전문대에 자리를 주셨어요. 그 젊은 나이에 강의를 시작했으니 그때부터 일찍 대학의 ‘꼰대’가 된거지요.”


-‘꼰대’란 삶이 안정됐다는 의미인가요.


“30대 초반에 교수가 되었으니 얼마나 으스댔겠어요. 비싼 옷 사입고 높은 구두도 신고 멋도 부렸지요. 그런데 슬슬 권태가 나기 시작했어요. 7~8년쯤 될 때 딱 사표를 냈죠. 학장님이 후회한다 한달만 시간을 주겠다고 했는데 한 달 만에 다시 가서 사표를 냈더니 유학갔다가 와라하시며 2년간 휴직기간을 주셨어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네요.


“그 해가 1986년일 거예요. 파리8대학으로 갔죠. 파리대학은 석박사 사이에 또하나의 과정이 있는데 그것도 학위과정이에요. 그 과정을 끝내고 돌아와서 진짜로 사표를 냈지요. 그리곤 짐을 정리했어요. 뾰족구두 드레스 다 내버리고 청바지와 운동화 하나만 남겼어요. 날아갈 것 같았어요. 파리는 제게 영혼의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 준 곳이지요. 파리대학은 실기실이 없었어요. 수업은 오로지 강의였지요. 강의내용도 미술뿐 아니라 미학 철학 사진학 생물학 예술학...폭이 넓었고 끝도 없이 방대했어요. 원래 대학은 인문학을 하는 곳이죠. 실기를 주로 하는 우리나라 대학이 좀 이상한 거예요. 저는 물 만난 고기처럼 미친 듯이 공부하고 죽어라고 글을 썼어요.”


-당연히 결과도 좋았겠죠.


“1992년 조형예술과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자크 랑 프랑스 문화부장관의 예술가를 위한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영구적으로 파리근교의 예술가촌(레지던스)에 머물 수 있는 행운을 얻었어요. 그러나 하루종일 작업실에서 웅크리고 앉아 전업작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제 체질에 맞지 않았어요. 가슴속에서 또다른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어쩌면 선천적인 방랑벽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진천에서 청주로, 서울로, 그리고 파리로 삶의 공간을 옮길 때마다 제 사고가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때 떠오른 곳이 인도였어요. 그래 떠나자 결정을 했죠. 제게 떠남은 두려움이 아니라 낯선 세상과 만나는 설레임이었으니까요.”


-선생님이 적어놓으신 약력 중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서 미소가 지어졌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활동인데 국내에서 잘 눈여겨 보지 않는다”는 표현이 있어서요.


“화가들은 작품이 팔려야 수입을 얻고 수입이 있어야 생활을 하면서 다음 작품을 또 창작하죠. 그러려면 갤러리와 고객의 상업적 마인드와 맞아야 하는데 파리에서도 영국에서도 갤러리는 저랑 잘 안맞았어요. 제 작품은 팔리는 작품이 아니거든요. 누가 저런 걸 사서 벽에 걸어놓겠어. 그래 나혼자 놀게.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내게 맞는 예술의 길을 찾자는 것이었고, 그게 바로 약력에 적어놓은 세계를 떠돈 ‘노마딕 프로젝트’들이었어요. 매순간 제겐 참 치열했던 작품들인데 사람들은 그건 작품이 아닌 줄 알아요. 그래서 절 보고 알려지지 않은 작가래요.”


-‘노마딕 작품’이 주로 행위예술로 이뤄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맞아요. 그래서 제가 하는 랜딩작업, 사라지는 것들은 아카이브로 남겨야 합니다. 저는 모든 작품들을 텍스트나 사진 영상, 글로 꼼꼼하게 정리해 두고 있어요. 제 모든 작품은 임상자료로 남아있지만, 그것을 본 사람들은 거의 없어요. 사람들이 작품을 소장할 때는 걸어놓으려 구매를 하죠. 그러니까 예뻐야 하고, 그러다보면 딜러에 끌려다니는 작품으로 변질될 수 있어요. 저는 눈치를 볼일이 없으니까 멋대로지요. 그래도 유럽에서는 제 활동이 나름 인지도가 있는데 국내에서는 이 분야가 활성화되어있지 않으니까 저를 잘 모를 수 밖에요.”


-약력을 보면 참 여러 곳을 다니셨어요. 1998년부터 인도-네팔을 비롯, 몽골, 티벳,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횡단열차, 중국, 일본 아키타, 마르세이유, 스위스, 불가리아,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DMZ와 청주 미호천 프로젝트까지 거의 매년 노마딕 프로젝트를 해오셨네요.


“40,50대를 길 위에서 산 것 같아요. 발길이 머무는 곳이면 어디든 아틀리에로 삼았어요. 몽골 사람들과 살면서 초원지대 목동도 되어보고, 인도에서 힌두교도 만나보고,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을 찾아가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공유하기도 했지요. 먼 고국을 떠나 척박한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시는 그 분들이 아직도 우리말을 지키고 있음이 고마워 가장 드시고 싶다는 음식을 사드리고 온 일은 작은 기쁨이기도 하네요. 어쩌면 제 삶의 가장 중요한 시간을 지구촌이라는 캔버스위에 제 몸을 붓 삼아 온몸으로 작업을 하고 다닌 것 같아요.”


-왜 그렇게 힘든 작업을 하시는 거죠? 가슴 속에 무엇이 있기에.


“아무것도 없어요. 가슴 속에 무언가를 지니고 있으면 무거워서 죽어요. 다 털어내는 거예요.”


-고향이 그립지는 않으셨나요.


“고향은 늘 그리웠죠. 어머니가 계시는 진천도 청주여고도 생각나는 곳이고. 그러나 당시는 낯선 사람들과 사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나는 노마드지만, 어디에도 정주민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들의 삶과 예술이 딱히 구분이 되지 않았어요. 모든 삶이 예술이었어요. 길 위에서 많은 추억들-예술을 주웠죠. 사람들은 다 쓰레긴줄 알지만, 그것들이 이번 전시회에 내놓은 에폭스로 고착시킨 작품들이에요.”


-근데 선생님 작품에는 컬러가 보이지 않아요.

“제 작품의 99%는 검은색이지요. 검은색은 매력적이에요. 패션도 가장 화려한 색은 검은 색이거든요. 색채학적으로 검은 색은 죽음 어둠 등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가장 깊이있고 미스테리하고 평생을 써도 질리지 않는 매력과 그 가치, 블랙홀처럼 빠져들지만 유토피아가 있을 것 같은 상상을 갖게 하는 색이에요. 젊은 시절 한때 블루를 쓴 적이 있었는데, 금방 질력이 났어요. 컬러는 아무리 잘 써도 제겐 느낌이 없었어요.”


-한국으로 돌아오시게 된 계기는.


“어머니가 위독하셨어요. 마침 파리 생활도 힘들었고요. 퇴직금과 서울에 있던 집 한 채를 판돈, 김환기 재단에서 장학금도 받았지만 한계에 부딪쳤는데, 어머니가 아프시다는 거예요. 어머니 마지막은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짐을 쌌어요. 제 사정을 아신 은사님이 비행기표를 끊어주셨지요. 어머니는 제가 돌아온 뒤 2005년에 돌아가셨어요.”


-귀국 후 잠시 오창에서 사셨던 것으로 아는데요.


“대학 동창인 충북대 이완호 교수 도움으로 충북대에서 강의를 좀 했어요. 그러다가 홍익대 대학원의 교수로 가게 되었지요. 오창집은 초등학교 친구가 주선을 해주고 한옥짓는 친구가 흙집을 지어줘서 한동안 살았는데, 서울로 강의를 다니려다보니 힘이 들어서 지금 거주하는 경기도 안성으로 집을 옮겼습니다.”


-연애는 해보셨어요?


“연애? 음 해봤지요. 근데 결론은 뭐냐. 아니다. 내 길은 따로 있다였어요. 프랑스 친구를 사귀었는데 인간적 매너는 훌륭했지만 문화충돌이 있더라고요. 또 고등학교 때 짝사랑한 과외교사가 있었는데 파리에서 돌아와 보니 돌아가셨더라구요.”


-하루 일과는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은퇴를 한 뒤 요즘 참 편하게 지내고 있어요, 살도 찌는 것 같아요. 나이들면 일찍 일어나지거든요. 요샌 어깨 퉁증으로 새벽 4~5시 깨는데 창문 열고 철수랑(철수는 그의 친구 강아지 이름이다) 나와서 텃밭을 둘러봐요. 100평 터에 작업실이랑 흙집이 한 40평 차지하고 마당에 20~30평되는 밭이 있거든요. 오이 가지 고추 같은 것은 사먹지 않아도 돼요. 그리곤 컴퓨터를 열어 메일을 확인하고 프랑스 친구들의 페이스북에 답해주고 커피를 한잔 마시며 정보를 뒤져보죠. 다행인 것은 컴퓨터로 세상을 다 볼 수 있으니까 디지털노마드라고 하잖아요. 집이 마을에서 떨어져있어 사람들을 안보려면 며칠씩 안보고 지낼 수 있어요. 전화를 안하면 말도 할 필요가 없지요. 철수야 밥 먹었니? 이런 정도만 하고 살아요.”


-건강은 잘 챙기시나요.


“이제 제 몸을 좀 위할 때가 된 것 같아요. 그동안 학대수준으로 몸을 돌보지 않았거든요. 스페인서 다친 어깨가 이 작품 흙집을 짓느라고 도져서 요즘 한약을 먹고 있어요.”


-순례자처럼 고독하게 예술적 편력의 길을 걸어오신 선생님에게서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저는 세상을 본 사람이에요. 가장 화려한 세상부터 가장 천박한 곳까지. 한때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서 중국 신경, 쑹화강 주변과 하얼빈을 가보기도 했지만, 끝내 그 흔적을 찾지 못했죠. 중국에서 두 분이 만나 저를 낳으셨다는데 엄마로부터도 아버지 얘기를 듣지 못했어요. 제 가슴 깊은 곳에 숨어있는 아픔이 어쩌면 저를 평생 방황하게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젠 그것도 다 지난 일이죠. 저는 제 삶이 좋아요.”
언제나 훌쩍 떠나는 것이 일상처럼 된 사람. 다 버리고도 가득 채워진 사람.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서일까, 인터뷰 내내 그의 표정이 들창문을 열고 꽃가루를 날리듯 가벼워 보였다.


-오랜 시간 고맙습니다. 또 새로워진 작품으로 만나 뵙길 기대합니다. <상임이사>


김주영씨 약력

* 1948년 진천 출생
* 진천삼수초, 진천중, 청주여고 졸업
* 홍익대 서양학과, 동대학원 졸업
* 1986년 도불, 파리 제8대학 조형예술학 박사(1992)
* 1987-2006년 파리 볼가 화실, 세잔느 예술가 촌 입주(프랑스 문화성 제공)
* 전 홍익대 미술대학원 부교수
* 현재 경기도 안성 분토골 거주

개인전
* 2000년 그로 부쑝: 에꼴 등 보자르, 비뇨-슈르-센느, 파리
* 2005년 떡갈나무 숲길, 한전아트센터
* 2007년 장-프랑스와 메이, 마르세이유
* 2009년 포스코 초대전, 서울
* 2011년 ‘오솔길에서 만난 사람들’ Aubagne, 프랑스
* 2017년 Paris Aasianow기획초청, 부산비엔날레

Performance-Installation in Situ
* 1998년 부적의 불꽃(인도-네팔)
* 1999년 이름없는 깃발들(몽고 투치크)
* 2000년 떠도는 무명의 영혼들이여(비무장지대)
* 2001년 시베리아 열차를 따라 고려사람의 유랑길(카자흐스탄, )
* 2003년 역사는 시민이 만든다-어느 노동자 조센징 이야기(일본 아키타, )
* 2004-2006년 옌징가는 길(프랑스 마르세이유-스위스 시옹, 티벳 옌징, )
* 미호천 물길따라(충청북도)
* 2008년 바람마을의 아이들(몽고 고비사막, )
* 2009년 Nomadic Village(불가리아 파브리케니, )
* 2011년 오솔길에서 만난 사람들(프랑스 Aubagne, )
* 2012년 Nomadic Village(영국, Durham, )
* 2013년 서사적 흔적이 있는 풍경 트라이앵글(남프랑스-알제리)
* 2014년 칭짱철길을 따라(북경-서안-라싸-팽목항)
* 2015년 분토길따라 철수와(경기도)
* 2016년 꽃의 제전(남인도)
* 2017년 프로젝트 노마딕 빌리지(스페인 그나라나) 등

저서
* <목마른 달팽이 여행> 동아일보사 (1999)
* <송화강은 흐른다> 신경 중국(2010)
* <신성한 소금> 시옹-마르세이-옌징(2008)
* <오솔길에서 만난 사람들> 오바뇨시 초대 레지던스
* <아티스트 김주영의 예술론, 아르비방이 가는 길> AMA(2012)
* <노마드 서사> 한결그래픽(2016) 등

 

김주영 작품 ‘황토집, 그땐 그랬지’
김주영 작품 ‘황토집, 그땐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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