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길 소설가

정안길 <소설가>

[동양일보]누구나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유별날 것이다. 아버지는 어릴 적에 헤어져 단면의 기억들만 머릿속을 맴돌지만, 홀어머니의 그 가파른 인생역정은 뼈아픈 애상을 안겨주었다.

열다섯 살에 두 살 아래 열세 살의 아버지를 만나 고작 십여 년을 살아가는 동안 어머니는 아들 삼형제와 딸 하나 사남매를 낳으신 뒤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부부가 생이별하였다. 그 뒤 무려 칠십여 년 동안을 홀로 자식들을 데리고 적막한 세상의 만난고초를 겪으면서 가슴조이는 기다림의 세월을 이어갔으나, 그 맵찬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몸서리치던 전쟁의 추억, 그 여름의 상흔을 끝내 지우지 못한 여름날에 마지막 호흡을 거두셨다.

사남매의 자식을 낳으셨으나, 딸 하나는 갓난이 적에 잃었고, 아들 하나 역시 어릴 적에 몹쓸 병을 앓다가 일찍 세상을 떴으니, 열아홉 살에 낳은 무녀리 맏이와 전쟁전야 불행하게 태어나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막내, 그 형제가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전란 당시 남편과 헤어진 수많은 여인들이 한마디 이별의 말조차 주고받지 못하였듯, 그런 정황은 어머니께서도 헤어지는 마당에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한 채 돌아올 줄만 알았으나, 그 순간의 허탈감을 기다림의 세월만큼 끌안고, 무정한 세월을 무심코 흘려보내고 말았다.

자식이 그 통탄하는 어머니의 애끓는 가슴을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든 치유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자식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생뚱한 말이 떠올랐고, 항차 어머니의 헛헛한 마음을 쓸어주고 위로한다하더라도, 치유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이런 비극이 결국 사주팔자의 굴곡진 가시밭길 그 운명을 탄식해야 하였고, 흔한 말로 남편의 덕이 없으면 자식의 덕도 없다는 무용론과 거칠고 험준한 인생살이가 정녕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일생이었다.

그러나 자식들은 나름 어머니께서 보아온 것처럼 무심하지는 않은 것이다. 다만 사나운 운명이 가져다준 피안의 고초가 불가항력을 넘어서지 못하는 임계점에서 나름 자탄의 세월을 보냈을 뿐이었다.

어머니의 그 뼈저린 백년의 생애. 그 핏빛 파탄은 있을지라도, 정녕 다시금 회귀의 기쁨은 없었다. 잔인한 세월, 그 모질고 무심한 일월의 관성적인 유성의 돌파구에서 어머니의 가녀린 호흡은 기여 멈추고 말았다.

해질녘 동구 밖을 향해 그 침침하고 매캐하였던 연하(煙霞)의 그름 속에서 해구지면 집으로 돌아오라고, 싸게 와서 저녁 먹으라고 소리쳐 부르던 애절한 목소리만 환청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상실의 시대를 넘어 아내는 다시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고, 남편은 아버지가 되어 더는 세월의 덫에 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일 뿐이었다.

백수(白壽)에 한 발 다가섰던 고령의 어머니는 초췌한 모습으로 병상을 지키시던 생전의 모습조차 무정한 세월이 앗아가고 말았다.

다시는 책장 펼치듯 볼 수 없는 모성의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은 이제 오로지 뇌리에서만 낡은 필름의 활동사진마냥 굼뜨게 움직일 뿐이다. 무정한 세월, 홀어머니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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