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석 우 시인 / 논설위원 겸 문학평론가

[동양일보]겐소(玄蘇)는 대마도에서 막부의 지시에 따라 외교 실무를 담당했던 인물이다. 임진왜란을 거쳐, 에도(江戶)시대 초기 국교회복 때까지 조선의 고위 관료들과 수없이 접촉하였다. 1588년부터 조선 정부를 드나들며 수호관계를 맺고 통신사를 파견해달라고 애걸복걸한다.1589년 6월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와 종의지는 풍신수길이‘조선 국왕을 불러내라’는 강압적인 명령을 내리자,‘통신사를 파견하라’는 내용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겐소는 이런 가짜 국서 내용으로 조선통신사(황윤길, 김성일) 파견을 성사시킨다. 그는 이 과정을 기회 삼아 주도면밀하게 조선을 정탐하고 있었다. 겐소의 곁에는 항상 오요시토시(宗義智)가 붙어 있었다. 종의지는 실상 대마도 종가 출신이 아닌 풍신수길에 의해서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교체된 기획 인물이었다. 그러나 수길은 대마도 종가의 아들이라고 대마도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겐소가 정사의 자격으로 부사 종의지와 조정을 찾았을 때, 조선의 관리들은 그들을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의 의도가 밖으로 내비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처신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조에게 조총과 앵무새 등을 선물로 받쳤으니 그 위장술은 가히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겐소는 조선을 몇 번 다녀가면서 각 지방의 사투리까지 구사하게 되었다. 겐소는 한양으로 올라오는 군사지도를 작성하여 바랭이 멜빵에 숨겨 돌아가는데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이 지도는 왜군이 동래에서 출발하여 한양까지 오는데 18일 밖에 안 걸리는 충분한 이유를 제공하였다. 겐소는 전쟁이 터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왜군의 척후병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게 된다. 이 때 금산의 의병장 조헌은 겐소는 첩자이니 목을 쳐야한다고 여러 차례 주장했었으나 오히려 자신이 유배당하고 말았다.

겐소의 활동무대가 바로 대마도의 세이잔지(서산사)였다. 현재의 서산사는 1732년 대화재를 입어 건물의 일부를 이전해 온 것이다. 그는 사후에 이곳에 묻힌다. 건물 주변의 나무들이 나이를 먹어 이제 건물과 연륜을 같이 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망국의 인사로 지목된 학봉의 탑에 겐소는 직접 글씨를 남긴다. 학봉은 이용당하였으니 의심 없이 그를 전정한 선비이자 친구로 대하였다.

학봉탑 밑에는 평산가의 묘와 표지석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평산 신씨들은 고려가 망하자 대마도 오우미(靑海)로 집단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그들은 고국이 그리워 죽어서나마 조선이 보이는 곳에 무덤을 짓는다. 이들의 죽으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염원은 먼발치로 조국을 바라보며 누워, 흙이 되는 연유가 되었다.

『해유록』의 저자 신유한도 1719년에 이곳을 거쳐 갔으나 흔적은 없고 단지 돌담과 산문이 옛 모습을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 언제 왔는지 본존에는 고려의 청동불상이 자리하고 있다.

겐소(玄蘇)는 임진왜란 직전, 고집이 센 조선의 유학자 김성일의 눈을 멀게 하여, 일본정탐 정보를 왜곡보고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1604년에는 유정 스님을 교토에 있는 후시미(복견성)에 안내하여 1605년 도꾸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와 회담을 주선하고 1607년에는 쇄환사를 안내하며 국교회복을 돕기도 하였다.

1590년 승려 겐소는 조선통신사가 세이잔지(서산사)에 유숙하는데 있어 템플스테이 감독관 역할을 하였다. 다음 해 11월 통신사와 풍신수길이 접견할 때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이 때 수길은“정명향도(征明嚮道)’(명나라를 치러가는 길을 안내하라)”고 요구한다. 고니시가 난처해하며 고니시가 난처해하며“가도입명(仮道入明/ 명나라에 조공 올리러가는 길을 안내하라)”는 내용으로 설명하지만 부사 김성일에 의해 틀어지게 된다. 서산사는 이러한 국서변조사건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막부는 1635년 겐소로 하여금 서산사 안에 절을 짓게 하고 외교 실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겐소는 절이 완성되자 이테이안(以酊庵)이라고 이름 지었다. 자신이 태어난 정유(丁酉, 1537)년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이곳의 주요 업무는 조선으로 가는 문서를 정확하게 작성하는 것과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감독하는 일이었다.

막부에서 파악하고 있는 이 업무의 적임자는 당시 지식층으로 분류되고 있던 승려들 이었다. 교토의 권위 있는 다섯 개 큰 절을 경도오산(京都五山)이라 불렀는데, 이곳이 당대 최고의 덕망과 혜안을 갖춘 승려들의 본산이었다. 겐소가 이정암을 건립한 이래, 1866년 명치유신까지 126명의 스님이 이곳에서 발탁되었다. 그들은 조선과의 외교와 우호의 끈을 이어갔으며 많은 인기와 명성을 누린다. 이정암의 2대 스님으로 1636년 국서 개작 사건에 연류 되었던 겐포(玄方)은 남부번으로 끌려가 형을 살게 되는데 이곳에서 크게 환영을 받는 일이 벌어진다. 이는 박식했던 스님이 조선과의 외교 경험을 통해 기술과 상업 등 폭넓은 분야에서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절 조선은 꿈과 희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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