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동양일보]원나라는 흡혈귀였다. 고려인들의 혈류는 그들의 영양소가 되었다. 한 국가가 외세에 핍박을 받을 때, 다 같이 고통을 나누며 버티면 그 내부에 힘이 고여, 외세를 떨쳐낼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친일파가 그러하듯 원나라의 지배가 지속되자 원나라에 붙어서 일신의 영화를 꾀하려는 집단이 생겨났다. 이른 바 이들을 부원배(附元輩)’라고 부른다.‘원나라에 붙어먹고 살던 무리’라는 뜻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홍다구다. 그는 1274년 원의 일본정벌 때, 소용대장군 안무사 고려군민총관(高麗軍民摠管)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뒤지를 털어내고 어선을 모두 징발하고 목공들을 모아 군선 제조에 앞장섰다. 고려군과 백성의 관리권을 가진 총독이었으니 왕까지도 얕잡아 보던 원나라의 충견이었던 바, 동원된 일꾼들에게 어찌했을지 상상이 가능해진다.

쿠빌라이는 고려에 이어 일본까지 손에 넣고 싶었다. 몇 차례 사신을 보내 일본을 회유하려 하였으나 일본은 번번이 사신의 목을 잘라 버리고 회답조차 보내지 않았다. 같이 동행한 고려의 사신은 살려 보낸 것으로 보아 그 때까지는 고려에 대해 우호적 입장을 건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쿠빌라이는 고려에 병선 9백 척을 만들어 내라고 압박하였다. 왕에 오른 지 6개월 밖에 되지 않은 충렬왕도 조선소를 시찰하며 공정을 관리하였다. 일본 원정이 10월에 잡혀 있는데 정월부터 병선 건조가 시작되었으니 공정이 너무 촉박하였다. 공사감독관 홍다구의 손에는 말채찍이 감겨 있었다. 이 채찍은 인부들의 등을 향하여 여지없고 망설임 없이 내려지고 있었다.

홍대구의 할아버지 홍대순은 의주 근처 인주의 지역사령으로 있을 때, 일찌감치 투항하여 1231년(고종 18년) 고려를 침공하는 살례탑의 향도가 된, 우리나라 매국노 1호였다. 그 아들 복원은 1232년 고려가 궁성을 강화도로 옮기며 항몽을 선언하자, 몽골군의 낭장이 되어 서북지방의 사령관이 되지만 고려병사에게 대패하여 겨우 목숨을 건져 들고 원나라로 도망친다. 이 지역을 훤히 꿰고 있는 복원은 원이 침공할 때마다 그 앞잡이가 되어 고려를 쑥밭으로 만들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부귀영화가 그의 뱃속으로 들어오는 듯하였다. 그가 매국노 2호이다. 나라가 어찌되든 출세에 눈이 어두운 인물이었다. 허긴 요즘도 힘 있는 정당에 붙어먹고 살면서, 옳고 그름은 못 본체하는 나라걱정 안하는 정치모리배는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이다. 개념도 잃고 깃발 밑에 모여 소리치는 불쌍한 족속들이다.

왕준이 몽골에 인질로 끌려와 있었다.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승화후 왕온이 그의 친형이다. 고종은 1238년 왕준을 친자식이라고 속이고 몽골에 인질로 보낸다. 몽골에서 거들먹거리며 사는 홍복원은 왕준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다. 1258년까지 왕준은 20년간 홍복원의 식객이 되어, 이 매국노의 볼 짓, 못 볼 짓을 다 목격하게 된다. 어느 날 복원은 왕준에게 "속담에 기르던 개가 도리어 주인을 문다더니 그 격"이라고 소리친다. 이 말을 들은 왕준의 부인이 "내가 개와 살고 있단 말이냐!"며 즉각 친정인 황실로 달려가 고변하니 장사 수십 명이 달려와 복원을 밟아 죽인다. 홍다구는 1261년 몽골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아버지의 관직을 계승하면서 왕준이 가지고 있던 고려 군민관령권(管領權)을 탈취하였다. 고려와 일본이 내통하고 있다는 거짓정보를 황제에게 올려 두 차례의 일본정벌에 나서게 만든 것도 홍다구의 공작이었다. 우리는 혹여 홍다구 같은 자에게 등을 내보이고 있지는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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