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환 청주시 흥덕구 주민복지과 주무관

한봉환 청주시 흥덕구 주민복지과 주무관

[동양일보]얼마 전 베란다 창호 공사를 위해 집안 살림을 정리했다. 처음에는 앞, 뒤 베란다에 있는 물건들만 거실로 들여보내 창호공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시작했지만 갑작스러운 영감을 받고 많은 짐들의 사용가치를 따져보기로 했다.

언젠가 태어날 조카들을 위해 남겨둔 우리 딸 손때 묻은 장난감, 다음 겨울에는 꼭 쓰겠다며 다짐한 보드복과 용품들, 결혼 전 아내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든 와인 거치대까지 살림을 차려도 충분할 정도의 짐이 쏟아져 나왔다.

하나하나 짐을 정리하며 흘리는 땀보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온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나 많은 살림살이들을 쌓아두고 살았나 하는 반성이 앞섰다.

처음 저 위치에 물건을 박아둘 때는 조만간 꺼내서 쓰겠지 하며 쌓아둔 물건들이 어느샌가 작은 내 키만큼 쌓여있는 모습을 보자면 여간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정리를 하고 물건을 버리는 게 마치 내 살을 떼어내는 듯한 공포감이 더 컸기에 버리지 못할 것 같다며 하루하루를 쌓아두며 핑계를 댔다.

이미 알고 있다. 저 물건을 버린다고 내 살을 떼어내는 고통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인생이 180도 바뀌며 새로운 고난에 직면하는 것도 아니다. 익숙함. 항상 있던 곳에 필요한 물건이 있어야 편안함을 느끼듯이 불필요한 물건들에게서도 익숙함을 느껴 정리하지 못한 긴 시간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살을 떼어내는 듯한 베란다 짐 정리는 게으름을 피운 덕에 일요일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마무리가 됐다.

결국 쌓아둔 물건들의 운명은 내가 처음 쌓아둔 당시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몇 번의 고뇌 끝에, 앞으로도 계속 쓰이게 될 물건들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게 됐지만, 과거의 내 생각에 쓰임이 있었기에 그 위치에 있던 물건들은 결국 필요하지 않은 물건으로 분류돼 더 이상 우리 집에서의 자리는 사라졌다. 새로운 주인을 찾아 나서기 위해 중고마켓으로 떠났거나 그 물건으로서의 쓰임을 다하고 은퇴를 맞이했다.

과거에는 곳간 가득 쌓아둔 식량이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비움의 미학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이를 실천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공간을 비우는 철학 또는 공간을 공백으로 채우는 기술이 대세인 세상에 살고 있다.

이제는 미니멀리즘이다. 예술 영역에서 유행하던 최소한의 표현인 미니멀리즘이 일상생활에서도 유행하고 있다. 벽을 가득 채우던 명화가 유행하던 시기가 지나고, 점하나 찍은 액자가 대체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우리 집도 오늘을 기점으로 미니멀리즘을 적용하기로 하며 베란다 정리를 마무리 지었다.

정리가 끝난 베란다를 바라보며 ‘이렇게나 넓은 공간이었나’라며 아내와 감탄을 한 것도 한순간. 뒤돌아서자마자 또다시 어떻게 그 공간을 채울지에 대해 고민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어디선가 들리는 비웃음 소리를 기분 탓으로 마음속에 다시 쌓아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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