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경대사비와 큰 알독 ②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동양일보]지금까지 법경대사 부도탑에 대한 우리나라의 기록은 단 한 줄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1999년에 와서 법경대사 부도탑을 언급한 최초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매우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법경대사 부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충주·제천 지방의 의병활동을 조사 연구하는 전 충주여자고등학교 교사인 최재호씨에 의해 동량면 하천리에서 <명와집(明窩集)>이라는 책자가 발굴되었는데 <명와집>은 한말 을미 의병부대에 종군했던 이기진(李起振)선생이 1905년에 저술한 책으로 전6권 6책으로 되어있다.

명와집에 수록된 “하곡동약집성”의 말미에 ‘동구부도(洞口浮圖)’라는 명칭을 볼 수 있다. 이어서 제수물품항에서 동구부도에는 구미각일도(口米各一刀)를 쓴다고 하여 “동구부도”라는 말을 두 번에 걸쳐 기록해 놓았다.

여기서 동구부도로 지칭되는 것은 곧 법경대사부도탑을 말한다고 하겠다. 그것은 법경대사부도탑의 원래의 위치가 정토사의 입구가 되는 마을 어귀에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정토사의 사역에 위치했던 홍법국사의 부도탑은 하곡마을 뒤편 옥녀봉이라는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동구부도라는 말은 적합하지 못하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기진 선생이 귀향하여 동약을 집성하던 1905년까지는 마을의 어구에 법경대사부도탑은 자리하고 있었고 그 뒤 1913년 다니이 세이이찌가 현장을 찾았을 때는 매각된 후였다. 따라서 법경대사부도탑은 1913년 2월 이전에 반출 되었다고 하겠다.

일제에 의해 반출되어 행방을 알 수 없는 법경대사부도탑을 찾기 위한 학계의 노력은 1980년대 중반부터 추진되었으나 국내에는 확인되지 않으므로 일본으로의 반출이 확실하지만 아직까지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1933년에 촬영된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1933년에 촬영된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법경대사부도탑은 탑비로부터 남동 60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부도의 현위치는 충주댐의 담수로 인하여 수몰되었다.

1983년에 시행된 발굴조사에서 부도탑지에서 8각 지대석 1매와, 2매의 방형 판석이 확인되었고 주변에서 많은 적심석들이 노출되었다. 특히 적심석 부근에서 골호 편으로 추정되는 토기편이 다수 수습되기도 하였다.

법경대사자등탑비는 원위치에 있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군인들의 총탄 표적의 대상이 되어 여러 군데 상흔을 입었고, 1984년 충주댐 담수로 인해 수몰선상 밖인 현재의 위치로 이건 되었다.

법경대사부도탑은 일본인들에 의해 마구 해체되어 원위치를 떠났으며 지금까지도 그 행방을 알 수 없고, 홀로 남은 탑비는 총탄에 몸을 떨었으니 우리민족의 수난역사를 고스란히 겪었다고 하겠다.

정토사에 있었던 4기의 석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반출을 면한 이 탑비는 전고가 3.15m로서 고려 태조 26년(943년)에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한림원사 최언위가 찬하고, 흥문감경 구족달이 봉교서 하였다.

탑비의 주인공인 법경대사는 속명이 현휘(玄暉)이며, 신라 879년(헌강왕 5)에 남원에서 태어나서 무염(無染)의 문하에서 선학을 수학했다. 906년(효공왕 10)에 당(唐)으로 건너가 도건(道乾)에게 수학하고 고려 924년(태조 7)에 귀국했다.

대사가 귀국하자 고려태조는 국사로 예우하여 정토사에 주석하게 했다. 그의 문하에서 홍림(弘琳), 법예(法譽), 대통(大統) 등 300여 명의 제자가 배출되는 등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는 세력을 형성하였다. 63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태조는 ‘법경’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자등(慈燈)’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법경대사 탑비는 귀부와 이수, 그리고 비신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지대석은 평면 사각형으로 모서리부분은 짧게 모 죽임 하였으며, 귀부는 지대석과 동일 석으로 치석하였다.

귀부는 몸체를 지대석 위로 높게 올리고 사방으로 발가락이 돌출되었다.

앞다리는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뒷다리는 약간 측면을 향하도록 하였는데, 4지의 발가락이 표현되었으며 발톱을 뾰족하게 하여 지대석의 상면을 딛도록 하여 굳건한 인상을 주고 있다 목 줄기는 귀두 아래로 길게 나와 직립한 원통형으로 앞면의 주름 문이 상하로 표현되었다.

귀두는 입안에 비교적 큼직한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눈. 코 등의 볼륨감이 강하여 역동적인 인상을 준다. 입 좌우로 뾰쪽한 이빨이 돌출되어 있다.

꼬리는 귀부의 하단에서 돌출되어 짧게 양옆으로 펼쳐져있다. 꼬리가 두 갈래로 양 옆으로 펼쳐진 특이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

귀부 외곽을 두르고 있는 귀갑문은 귀부 상부의 전체를 덮고 있는데, 귀갑문은 1조의 굵은 돌기 대를 6각형으로 구획한 후, 그 안에 좁은 1조의 6각형 구획 대를 표현하였다. 귀갑문은 귀갑에서의 위치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약간씩 다르다.

귀갑 상부에 표현된 등줄기는 가운데에 1조의 돌기 대를 마련한 후, 다시 좌우로 일정한 너비의 돌기 대를 만들었다. 특히 우측발위에 마련된 귀갑 안에는 이 비석의 다른 귀갑문에 나타나지 않는 卍자가 각출되어 있어 흥미롭다고 하겠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중인 충주 정토사지 흥법국사탑.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중인 충주 정토사지 흥법국사탑.

고려시대에 조성된 탑비의 귀부에 卍자나 王자가 각출되거나 또는 교차되어 배열되는 예는 있으나 卍자 한글자만을 표현한 것은 법경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예라고 하겠다.

비좌 상부는 사각형으로 홈을 마련하여 비신을 삽입 고정하도록 비신 홈을 시공하였다.

비좌 상면에 비신을 받치기 위한 여러 단의 비신 괴임대가 마련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비신은 하부에 별도의 홈대 없이 통째로 비신 홈에 삽입 고정되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귀부는 비교적 대형으로 귀두와 발의 표현, 짧은 꼬리의 표현 등이 역동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다. 또한 귀갑문과 비좌 측면의 문양 표현은 볼륨감이 강한 편이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는 거북이의 몸인데 머리는 용에 가깝다. 등과 짧은 다리, 뭉툭한 발가락의 표현은 거북이지만, 부릅뜨고 있는 커다란 눈과 머리에는 뿔 장식이 있으며,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과 입가의 수염을 통해서 용을 형상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수의 밑면에는 연꽃을 조각하였고, 네 귀퉁이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를 조각하였다. 이수 앞면의 중심부에는 편액을 만들고 내부에 ‘법경대사’라는 시호를 해서체로 새겼다.

편액의 좌우에는 두 마리의 용이 입을 벌리고 있는데 편액 위에 화염에 쌓인 여의주를 두고 서로 다투는 형상이다. 비신에는 계선을 긋고 글자를 새겼는데 앞면에는 3,200여자, 뒷면에는 300여자의 음기가 있으며 비신의 실측치는 높이 230cm, 너비 110cm, 두께 78cm이다.

장준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장
장준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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