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선 충북대 의대 명예교수

엄기선 충북대 의대 명예교수

[동양일보]과학에 새로운 문제는 없다고 한다. 난제는 나 이전에 이미 알려져 있고, 아직 해결한 사람이 없을 뿐이라고… 수수께끼, 파라독스와 싸우는 생활은 그러므로 연구자에게 축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대로 된 문제를 잡았다는 사실 하나로 전심을 다해 도전할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나라의 기생충학은 고바야시 하루지로 교수로 시작한다. 그는 1917년에 내한하여 조선총독부병원(현 서울대학교병원) 및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의대)에 부임하고, 1945년 광복 때까지 재직하면서 4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였던 그는 일제강점기의 일본인이기는 하였으나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 훌륭하였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학자로 우리나라 기생충학의 정립에 가장 공로가 컸던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기생충학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표한 한국인도 40여명에 이르지만 정작 광복을 맞이하였을 때 기생충학교실에 교실원으로 남아 있던 분은 한분도 없었으며 이는 우리나라 기생충학으로 보아서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대한기생충학회, 1979).

필자가 기생충학을 처음 시작할 때만해도 일본의 두터운 학자층은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우리가 200명이라면 그들은 열배가 넘는 2000명 수준이었는데 그때가 1980년, 해방후 35년이 지났을 때인데도 불구하고 필자가 그렇게 느꼈다는 점이 꿈같이 아스라이 느껴진다. 우리나라의 기초의학 여러 학문은 그러한 불운의 시기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숨가쁘게 달려와 대단한 발전을 이루었고, 지금은 세계와 각축하게 되었다.

기생충학은 열대의학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특히 기생충열대의학은 제국주의적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에 자국민과 군대를 파견할 때 말라리아와 같은 기생충열대병에 걸려 죽는 일이 많으므로 이에 방어적으로 발전시킨 의학분야인 것이다 열대의학의 아버지는 영국의 패트릭 맨슨인데 19세기에 방대한 대영제국 연방을 형성한 것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특성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또 다른 학자, 요코가와 교수는 대만에 파견되었던 기생충학자였는데 1935년 그는 중요한 문제를 하나 논문으로 제기하였다. 그의 질문은 이러 하였다. 대만의 민촌충은 정말 민촌충일까? 그것은 교과서 대로 쇠고기를 먹고 오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마을 주민에서도 쇠고기를 먹었다는 사람이 많아야 하는데 실제로 쇠고기를 먹은 사람이 드문 것은 왜일까? 혹시 교과서가 틀린 것은 아닐까? 처음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

질문은 도전의 시작이다. 그렇게 시작한 그의 연구는 세계대전의 와중에 묻히게 되었고, 다시 재개된 것은 전쟁이 끝난 한참 후, 1960년대 였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꼭 같은 문제가 제주에서 의심되었다. 의문은 놀랄만큼 유사한 것이어서 필자가 제주 토박이 의료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하루는 실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당시에 우리나라 원로 학자들 또한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제주의 어떤 중간숙주 동물이 혹시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을 하였던 것이다. 거론된 것은 소, 돼지, 닭 뿐 아니라 개, 고양이, 양, 염소 심지어 한라산 야생동물까지 안나온 동물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었던 당시 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상하게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한다. 가슴 두근거리는 의문을 평생의 연구대상으로 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국 이 주제에 그 누구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일본인이 제기한 이 난제를 해결하고, 그것이 새로운 종의 발견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으니 그때의 가슴 두근거림이 올바른 신호였다는 것이 한참 시간이 지난 이때까지도 놀랍고 기쁠 뿐이다.

필자가 젊은이에게 권하고 싶은 말은 아주 간단하다. “열정은 넘치는데 무엇을 할 지 잘 모르겠다면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을 찾으세요. 그리고 그것을 하세요. 행복이 그안에 있습니다. 세상에 나보다 이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 없다면 다른 누구보다 당신이 더 오래, 더 잘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성공할 가능성도 남보다 높겠고요. 그러니 자신의 가슴을 믿으세요.”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