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종 전 꽃동네대학교 총장

유성종 전 꽃동네대학교 총장
유성종 전 꽃동네대학교 총장

 

[동양일보]우리 고장을 꽤 오랜 세월 동안 양반(兩班)도(道)라고 했었습니다. 저는 봉건적 양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마는, 그것이 순박(淳朴)하다는 뜻으로 지칭한 것이라고 긍정합니다. 비유하여 어떤 도를 맹호출림(猛虎出林), 어떤 도는 이전투구(泥田鬪狗)라고 한 것에 비하여 충청도를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 한 것은 옳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청주를 교육도시라고 곧잘 말했습니다. 그 뜻을 저는 학교가 많아서가 아니고, 도민이나 시민이 본받아 배울만한 고장이라고 생각한 데서 나온 평가였다고 해석합니다. 그 청주가 그 이름에 맞게 유지되고 있느냐는 별개문제입니다.

그런데 또 지난 세월에 우리보고 ‘멍청도’라고 한 폭언이 있었습니다. 총선에서 어떤 지역은 야당 일색으로 어떤 지역은 여당 일통으로 뽑아 놓고서, 자기들과 같이 하지 않았다고 그랬던 것인데, 공화국에서 여야를 골고루 뽑는 것이 민주적인 것이지, 진실로 누가 멍청이고 어디가 멍청도입니까? 그때 저는 응답했습니다. 특히 서울의 중앙청에 근무할 때, 전국의 지성인(知性人)들에게 공언했었습니다. ‘지역감정으로 한쪽에 편향되게 투표하는 것이야말로 멍청도가 아니냐?’라고.

이럴 때 채근담(菜根譚)의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鷹立如睡 虎行似病 正是他攫人噬人手段處 要聰明不露 才華不逞 纔肩鴻任鉅的力量’(매가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조는 것 같고, 범이 거니는 모습은 마치 병든 것 같다. 바로 이것이 그것들이 사람을 움켜잡고 사람을 깨무는 수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총명함을 나타내지 않고, 재주는 함부로 부리지 않고서야, 비로소 큰일을 어깨에 메고 갈 역량이 있다고 할 것이다. 전집 197)

지도자의 참다운 용기와 봉사는 이런 풍도(風度)를 지녀야 합니다. 저는 우리 고장에서 해고(海高) 이상록(李相錄) 선생을 뽑습니다.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용화온천 개발저지 투쟁’과 ‘오송 전철역 유치운동’에서 그가 보인 진취적이고 열화 같은 행동은 안방샌님으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초인적인 쾌거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런 것이 사회정의의 이름값입니다.

공자(孔子)가 수제자인 자로(子路)의 질문에 답하여 ‘반드시 정명(正名)을 먼저 하겠다.’(논어, 자로)고 하셨습니다. 그 정명은 정치적 상황에서였지만, 사전적 적용도 좋을 것입니다.

청주시의 율양동(栗陽洞) 동명오기의 문제도 그 좋은 예입니다. ‘율양동(栗陽洞)’을 ‘율량동’으로 오기해 놓고, 그 실수와 착오를 고치려 하지 않아서 교육문화도시라는 청주가 무식(無識)한 고장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공직을 벗어난 2008년에 시의회에 동명오기를 정정해 달라고 청원했더니, 청주시의회는 그 권한인 독자적 입법권을 포기하고 청주시에 이첩한 것으로 끝냈습니다. 4년 뒤에 다시 청원했더니, 시청은 한글학회에 유권해석을 의뢰해서 ‘율양동’이 맞는다는 답을 받아가지고 있었으며, 부시장과 담당과장이 제집에 찾아와서 가로되 ‘율양동이 워낙 커져서 미구에 분동(分洞)할 예정이라, 그 분동 때 겸행하겠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수십 년을 참아온 것,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는 말에 ‘청주의 부끄러운 일이니 조속히 해결하여 달라.’고 청하면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청주‧ 청원 통합이 이루어지고, 청원구와 서원구의 관할 재획정이라는 좋은 기회를 고의인지 과실인지 그냥 보내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유권해석을 의뢰할 것도 없는 상식적인 사안입니다.



정명에서 이러한 익살거리가 있습니다. 시내버스의 ‘이번 내리실 정류장’ 이어서 ‘다음 정류장’의 안내 자막에서 외국인을 위하여 영문표기를 한 것은 좋았는데, 00Univ. Rear Gate라고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필경컨대 한글 표기 후문(또는 뒷문)의 뒤를 rear라고 한 것이지만, 리어카(rear car)와는 다른 쓰임입니다. 리어카는 뒤에서 민다는 것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동대문 동문이 있고 남대문 남문이 있고 서대문 서문이 있어서, 세계 공통의 이름 east gate/ west gate/ south gate가 있는데, 후문을 직역해서 rear gate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엮어서 방송을 하고 있으니 딱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한다고 서울의 지명에 한자(漢字)병기(倂記)를 했는데, 그것은 중국의 한자 간소화를 모르고 그들이 알지 못하고 일지 못하는 재래의 한자표기여서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뒷문은 방안의 ‘앞문 뒷문’처럼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공공기관, 특히 학교에서는 학생을 위하여 안 쓰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00고등학교에 교장으로 가서 부임 1주일 만에 이른바 뒷문을 걸어 잠그고, 동쪽의 정문으로만 등하교하라고 금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학부모들의 반대 소리가 많다는 간부교원의 말을 듣고서, 저는 ‘대학도 뒷문으로 들어간답디까? 곧 서문을 만들어서 그쪽 길로 다니게 할 터이니, 조금만 견디라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 ‘대학도 뒷문으로 들어간답디까?’는 한때 명언(名言)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저는 어린 학생들이 개구멍으로 드나드는 것이 청소년의 기상(氣像)을 위해서 안 되는 일이고, 무엇보다도 가슴을 펴고 정정당당하게 걷는 습관으로 성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지성(知性)의 전당(殿堂)이라는 대학에서 ‘후문, 뒷문’에 무감각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회의 모든 정명(正名)에 허명(虛名)이냐 실명(實名)이냐가 많습니다. 사람과 물건의 가짜냐 진짜냐의 문제입니다. 호두알이 없는 호두과자를 겉모양이 호두 같다고 호두과자라 할 수 있는가, 우리의 고유한 송편에 솔잎을 쓰지 않아 송향(松香)이 나지 않는 것을 송편이라고 할 수 있느냐 등도 사회풍조 전반으로 볼 때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거짓과 허식은 불신사회를 말하는 단초이니까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일본에는 도둑도 도리(道理)가 있고, 중국에는 뇌물 받기에도 법도(法度)가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것에는 자리 값이라는 과업(구실, 책임)이 있습니다. 노인은 나이 값, 직장인은 자리 값, 선출직 공무원은 이름값을 해야 합니다. 공무원과 노무원과 사무원에게 그래서 봉급이라는 보상이 주어집니다. 퇴직자에게 연금이 지급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 바루기(正名)는 인간과 사물의 정체감(正體感)=주체의식과 정의로움의 척도입니다.

정치에 거짓이 얼마나 많습니까? 거짓말 잘하는 것이 유능한 정치인이라니요? 저 유명한 메르켈 독일수상도 최근에 만난 독일국민의 한 사람은 저에게 ‘그 여자는 말만 하면 거짓으로 국민을 속이고 있어서 이민가고 싶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 바루기(正名)은 소중한 사회적 가치요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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