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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10>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10>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5.08.02 1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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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진과 심덕의 사랑에 포석은 까닭모를 두려움이…
▲ 한국 최초의 창작 희곡집 포석의 ‘김영일의 사’. 1923년 2월 동양서원이 발행했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한참 뜸을 들이던 김우진이 말했다.

“아닐세, 진짜 사랑. 사실은 너무 괴롭고 흔들리는 마음에 그렇게 말하기도 뭣하기는 하지만.”

포석이 자세를 고쳐앉아 진지하게 되물었다.

“누군가?”

“윤심덕일세.”

‘흐으∼음’, 포석의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목포에 있는 자네 처는 모르는 사실이겠지?”

“자네에게 처음 이야기하는 것일세.”

“요즘 같은 조선 세상에서 처자있는 지식인이 신여성과 사귄다는 게 흠될 일만은 아닐는지 모르지. 세태가, 유부남 지식인과 신여성 사랑이 무슨 로맨틱의 종극인양 받아들이고 그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으니. 그래, 자네는 어찌할 요량이신가?”

“모르겠어. 그냥 좋은 거야, 뭘 어찌해보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그녀를 보면 가슴이 뛴다네. 그 설렘, 울림, 처음 가져보는 것이야.”

“윤심덕 그녀도 자네와 같은 마음인가?”

“그런듯 하이.”

포석은 양주 한 잔을 깊이 들이켰다. 싸아한 기운이 목줄기를 타고 넘어갔다. 우진도 따라 마셨다.

“세상일에서 남녀간의 사랑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런데 사랑은 아픔을 동반하는 법. 수산, 나는 말일세 자네가 겪을 그 아픔이 자꾸 마음에 남아. 대가 강한 심덕의 그 심성도 조금 걸리고. 그럼에도 내가 수산 자네에게 해 줄수 있는 말은 마음 가는대로 가라는 것일세. 마음 가는대로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후회가 찾아와도 그 후회가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 싶으이.”

포석과 우진은 말없이 양주를 비워냈다. 밤이 깊어갔다. 깊어가는 밤처럼 까맣게 밀려오는 까닭모를 두려움, 포석은 흠칫 몸을 떨었다.

 

포석이 문인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 1920년대 문학계는 근대문학의 완성을 이룬 시기라 할 수 있다. 국문학사적으로 볼 때 근대문학 완성의 중심에는 조명희의 소설 ‘낙동강’이 자리잡고 있다.

1910년대 ‘문학의 과도기’를 거쳐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면서 한국문학은 자아에 대한 각성과 함께 민족의 현실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주축으로 그 시야가 확대되었다. 조명희 또한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룬 바 있다.

1920년대 들어 문학계에는 새로운 사상이 유입된다. 현실의 새로운 인식과정을 통한 리얼리즘 소설의 등장과, 식민지 상을 극복하기 위해 유입된 사회주의 사상이 그것이다. 계급적 자각과 대립의식을 표현한 계급주의 문학(16)과, 이러한 카프 계열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문학자들이 주창한 국민문학 운동(17)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두 축으로 발전하게 된다.

조명희의 문학은 계급주의적 대립의식을 형상화한 ‘프로 문학’과 민족의 개념을 중시한 ‘민족주의 문학’을 모두 아우르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포석은 1919년 일본 도쿄로 건너간 뒤 5년동안 유학생활을 했다. 유학 생활 중 그는 주로 시 창작에 몰두했는데, 1920년부터 1923년 전반기까지 그는 주로 로적(蘆笛)이라는 필명으로 시를 썼다. 그리고 1923년 후반기부터 포석(抱石)의 필명으로 100여편의 시를 창작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조선지광과 개벽 등 잡지들에 발표된 것도 있지만 그의 많은 시들이 1924년 한국 최초의 창작시집 ‘봄 잔디밭 위에’에 처음 수록됐다. 이때 수십편에 달하는 가장 우수한 시편들이 일제 경찰의 무참한 검열로 삭제돼 이 시집에 실리지 못했다.

 

1923년 2월 어느날, 포석은 들뜬 마음으로 동양서원을 찾아갔다.

민준호가 소유하고 있는 동양서원은 서양식 3층건물이었다. 화려한 건물의 외양이 찾는 이를 주눅들게 할만했다. 경성 어디에도 이만한 것이 없지않을까 싶었다.

이날은 포석이 한국 문학사상 최초의 창작 희곡집인 ‘김영일의 사’(18)를 발간하는 날이었다. 어찌보면 첫번째 발표작을 가지고 정식으로 조선 문단에 등당하는 셈이었다.

‘戱曲, 金英一의 死, 趙明熙作, 東洋書院發行, 1923年 2月 刊’. 책 표지에 희곡의 주인공 김영일을 그려넣은 삽화가 마음속으로 짠하게 다가왔다. 표지에 그려놓은 청년은 김영일이기도 했고, 포석 자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청년의 모습은 가난한 문인으로서의 지난한 삶을 시작하는 포석의 첫 걸음이기도 했다.

동경 유학생활은 포석에게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가 그토록 가벼이 여기려던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본이란 놈은 그가 고고한 삶의 모습을 견지하려 해도 고단한 그의 어깨를 더욱 축 처지게 했다. 학업도 이어가기 어려웠다. 사정이 괜찮은 이를 찾아가 돈을 빌리려 했던 적이 몇 번이었던가. 그러나 번번이 거절당하고 말았었다. 그럴 때마다 포석은 ‘이깟 것이 다 무어냐’며 유학생활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조선에 있는 처자식 생각도 났다. 맏딸 중숙은 벌써 아홉살이었고, 둘째딸 중남은 네살이었다. 딸 둘에 일정한 수입조차 없는, 그 빈곤한 생활을 오롯이 아내 혼자 꾸려가고 있었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늘 그를 옥죄어 오던 터였다. 동경에서의 포석 또한 무일푼으로, 어찌어찌 이어오던 학업조차 이제는 도저히 이어가기 힘들었다. 그해 봄 포석은 결국 대학 졸업을 앞두고 귀국했다.

돈 몇 푼 호주머니에 넣고 포석은 동양서원을 나와 거리로 나섰다.

‘돈 몇 푼이나 한다고… 그동안 참 내가 무심했지. 오늘은 아이들에게 맛난 거라도 좀 사줘야겠군.’

종로2가엔 시장 상인들로 북적였다. 아내가 좋아하는 파전과 아이들 몫으로 풀빵 몇 개를 샀다. 괜스레 뿌듯해지는 기분이었다. 한 블록을 지나 시장 뒤편을 지나고 있는데 한 귀퉁이에 땟국물에 찌든 아이들 몇이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지나가는 행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혹여나 무얼 주지는 않을까, 그래서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간절한 눈빛이 그 아이들에겐 있었다. ‘이건 중숙이 중남이 거야’ 되뇌이며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시선은 자꾸 그 아이들에게로 돌아갔다.

“너희들 점심은 먹었니?”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었다.

“아침도 못 먹었어요.”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 하루 종일 한끼도 못먹고 아이들은 퀘퀘한 시장 한 바닥을 지키며 마음씨 좋은 행인이 혹여 적선이라도 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나로 검은 눈만 껌벅껌벅하고 있었던 거였다.

가슴이 아렸다. 포석이 그냥 지나치면 그 아이들은 필시 쓰레기통을 뒤지며 허기진 배를 채울 무얼 찾을 것이었다.

‘땟국물 흐르는 저 아이들의 모습이 우리 조선 백성의 모습이려니, 국권을 잃은 우리 조선의 모습이려니.’

포석은 중숙과 중남을 주려고 샀던 것들을 모두 그 아이들에게 주었다. 아구아구 달려들어 정신없이 주린 배를 채우는 눈망울 검은 아이들을 뒤로 하고 포석은 터덜터덜 빈 손인 채 집으로 행했다.

포석의 맏딸 중숙씨는 작고하기 전 조카 조성호씨와의 인터뷰 ‘우리 아버지 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원고료 1원을 타서 집으로 오다가 거지가 한 푼 보태달라는 바람에 주머니를 뒤지니 달랑 그 돈밖에 없어 그걸 주고 왔단다. 잔돈이 없어서. 집에서는 쌀이 떨어졌다고 울상이구. 너무 인정이 많은 분이었지. 한번은 책을 팔아 집에 오는 길에 다리 밑에서 약장사 구경 온 어려운 사람들에게 그 돈을 나누어준 일도 있었다니 돈에는 미련 없는 분이고, 집안 살림은 엉망이었지.”

 

1922년 9월, 염군사(19)가 조직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포석은 그때 동경에 있었다. 신경향파시대의 문학을 담당한다고 자처하던 이들이 ‘해방문화의 연구 및 운동을 목적으로 한다’는 행동 강령을 내세운 문학단체였다. 잡지 ‘염군(焰群)’을 2집까지 편집했는데 일제의 검열에 걸려 발간되지는 못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포석은 그 이야기를 듣고 염군사 조직을 주동했던 이적효, 이호, 최승일, 박용대, 송영 등에게 어떤 동질감을 느꼈었다. 그들에게 ‘아마추어적’이라는 비판적 시각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이 지닌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 하나만은 높이 살만하다고 여겼었다.

후일 염군사는 카프를 설립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16) 계급주의 문학

프롤레타리아 문학. 무산자(無産者) 문학. 계급주의적 발생에 의해서 무산자들의 계급적 자각과 이에 의한 대립 의식을 표현하려는 문학이다. 이에 따라 프로 문학은 신경향파에서 그 싹이 보이기 시작하여 카프에 의해 하나의 형태로 굳어졌으나, 1930년대 중반에 카프의 해산과 때를 같이 하여 소멸되었다. 대표적 작가로는 조명희, 임화, 김기진, 박영희, 최서해 등이 있다. 정식 카프 맹원은 아니지만 프로문학에 대한 동정적 이해에서 경향적인 이론과 작품을 발표한 동반작가로는 유진오와 이효석, 엄흥섭, 채만식 등이 있다.

 

(17) 국민문학 운동

1920년대 중반부터 형성된 카프 계열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문학자들이 주창한 문학 운동. 계급 위주의 이데올로기 문학에 반발하여, ‘민족’ 개념이 문학 활동에 있어 가장 중요함을 역설하고, 우리 민족의 문학을 만들어 보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대표적 작가로는 최남선, 이병기, 염상섭, 조운, 주요한, 이광수, 김영진, 이은상 양주동 등이 있다.

 

(18) 김영일(金英一)의 사(死)

조명희의 처녀작. 1921년 동우회 순회극단에 의해 전국에 순회공연돼 널리 알려졌으며, 그 여세에 힘입어 1923년 동양서원(東洋書院)에서 같은 이름의 희곡집으로 간행됐다.

‘김영일의 사’는 한국문학사상 최초의 희곡 창작집이다.

그 당시 이 작품의 공연성과를 전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이 작품의 공연은 관객에게 비상한 충격을 주었는데, 동양서원에서 간행한 희곡집 내용과 공연극본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희곡집 서문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는 출판 검열 과정에서 대사의 중요 부분이 모두 삭제당해 생긴 결과다.

모두 3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동경에 유학중인 가난한 고학생 김영일의 참담한 삶과 죽음을 다루었다.

‘김영일의 사’는 주인공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일제 식민지 치하의 조선 젊은이들의 고통과 저항을 그리고 있다.

포석의 궁핍했던 동경유학생활과 사상적 번뇌와 고단한 삶의 모습이 희곡의 주인공 김영일의 삶에 상당부분 투영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 염군사(焰群社)

1922년 9월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문학 단체.

신경향파시대의 문학을 담당한 프로문학 집단의 하나로 이적효(李赤曉), 이호(李浩), 김홍파(金紅波), 김두수(金斗洙), 최승일(崔承一), 심대섭(沈大燮), 김영팔(金永八), 박용대(朴容大), 송영(宋影) 등이 조직했다.

이 문학 단체는 기관지에 해당되는 잡지 ‘염군(焰群)’을 발간하고자 2집까지의 원고를 모아 편집까지 끝냈다. 그러나 일제의 검열에 걸려 압수돼 끝내 활자화되지는 못했다.

염군사는 정신적으로 강경파에 속해 있었으며 문예 활동을 철저하게 계급투쟁의 방편으로 생각해서 같은 무렵에 발족을 본 프로문학단체인 파스큘라(PASKYULA)와 대조가 되었다.

파스큘라의 주동 세력은 김기진(金基鎭)이었는데, 그는 프로문학운동을 표방하면서도 끝내 좌파의 실제 활동에는 관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염군사의 이적효나 이호는 공산당의 지하조직에 가담하여 공작화사건에 연루됐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폐인이 되거나 옥사를 하였다.

문학작품의 질은 파스큘라에 비하여 떨어지는 편이라는 평가다. 뒤에 염군사는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를 결성, 발족시키면서 발전적으로 해체, 흡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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