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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9>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9>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5.07.26 1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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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울렸던 ‘순회공연’ 민족주의 발언에 막 내리고
 
▲ 세련된 양장에 하이힐을 신은 수선 윤심덕(위 사진)과 귀공자풍의 교복을 입은 수산 김우진.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호가 비슷하다. 1926년 조선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두 사람의 ‘현해탄 정사(情死)’는 포석에게 큰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윤심덕은 포석이 조선순회공연을 다닐 때 ‘프리마돈나’로 활약했고, 김우진은 포석의 생애에서 가장 친한 벗이었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그녀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온 터였다. 그러나 윤심덕(14)은 그런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쿄에서 윤심덕은 유학생들과 폭넓게 교류했었다. 해서 알만한 사람은 그녀를 다 알았다.

육척(180㎝) 장신이라 불릴만큼 키가 큰 그녀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활달해 ‘왈녀’로 통했다. 순종을 미덕으로 여기던 조선 여인들과 달리 윤심덕은 남성적이고 쾌활해서 남학생에게도 내외하는 법이 없었고 몇 번 만나면 서슴없이 말을 놓곤했다. 홍난파(15), 채동선 등 유학생들과 ‘자유롭게’ 염문을 뿌렸지만, 자기가 싫은 사람은 아무리 구애를 해도 눈 한번 껌벅이지 않았다. 니혼(日本)대학 문과에 다니던 박정식이 그녀에게 반해 꽃다발과 시를 바치며 구애를 했지만 그녀가 늘 냉정하게 뿌리쳤던 일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던 터였다. 후일 그 박정식이 실연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생겨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해 몇년 동안 총독부병원 8호실에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그녀는 “아무리 내게 반해 실성했기로 내가 싫은데 어떻게 사랑을 받아주냐”며 매몰차게 대했다.

 

동아일보 1925년 8월 4일자 ‘석일은 악단의 명성 윤심덕 3’에서 그녀를 이렇게 서술했다.

윤심덕은 싫은 사람에게는 한없이 쌀쌀맞게 대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서슴없이 애정을 표시했다.

윤심덕이 동경에 있을 때 특히 친하게 지내는 청년이 두세 사람 있었다. 그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윤심덕과 그 청년들이 사랑하는 사이라느니 어쩌느니 하고 아주 본 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윤심덕의 정숙지 못한 행동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웬만한 사람의 입에는 거의 오르내릴 정도로 소문이 자자했다.

남들이 자신에 대한 험담을 하면 할수록 윤심덕은 자기와 가깝게 지내는 청년들에게 더욱더 노골적으로 애정을 표했다. 그러다 보니 윤심덕을 헐뜯는 사람들이 제풀에 지쳐 다시는 그 같은 말을 입에 담지 않은 일도 흔히 있었다. 다시 말하면 윤심덕은 자기 속만 결백하면 세상에서야 아무렇게 떠들거나 머리털 하나 까딱하지 않는 뱃심이 있었다.

 

조선 순회공연을 떠나는 자리에서 김우진은 윤심덕과 처음 만났다. 김우진에게 그녀는 참 독특한 여자로 보였다. 우진은 그때 이미 목포에 아내와 딸을 두고 있었고,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으로 도쿄에서 일본인 간호사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해서 서로간에 어떤 교감이나 애틋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윤심덕은 남자 단원 가운데 한 사람과 친밀한 관계였다.

순회극단이 일본을 떠나 부산에 도착한 뒤 여관에서 여장을 풀었다. 그런데 여관방이 모자랐다. 그녀는 독방에서 자지 못하고 남자 단원들과 함께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그런데 윤심덕과 가까웠던 단원이 그녀를 취하고 싶은 욕심에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깜짝 놀란 윤심덕이 벌떡 일어나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곤, “네가 그같이 더러운 남자인줄 모르고 가깝게 사귀었더니 이것이 무슨 금수의 행동이냐?”며 호통을 쳤다. 그 남자의 백배사죄로 일단락 되었지만, 우진은 그때의 일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참 묘한 매력을 가진 여자구나!’

 

순회공연은 순조로웠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관객이 운집했고, 뜨거운 박수로 호응했다.

1921년 7월 8일 부산 공연을 시작으로 8월 18일까지 ‘동우회 순회극단’은 전국 25개 도시를 돌았으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민족주의와 독립심을 고취시키는 강연과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 윤심덕의 독창은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때까지 조선에선 변변한 공연이 없었던 터였다. 연극은 주로 포석의 창작물인 ‘김영일의 사’와 홍난파 작 ‘최후의 악수’, 김우진 번역의 ‘찬란한 문’ 등으로 진행됐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들은 울고 웃고, 탄식을 내쉬고, 탄성을 질렀다.

포석은 ‘찬란한 문’ 연극의 남자 주인공까지 맡았다. 홍난파는 ‘최후의 악수’에서 유춘섭은 ‘김영일의 사’에서 세 사람이 각각 남자 주인공을 맡고 그 상대 여자역은 마해송이 도맡아 했다. 이때부터 이미 포석은 문인으로서의 명성 뿐만 아니라 엔터테이너로서 깊은 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러나 동우회 극단은 ‘김영일의 사’ 공연 중에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일어나 도중에 막을 내리게 됐다.

공연을 하던 중에 “십년 전에는 자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자유가 없다”라는 대사가 그 자리에 있던 일경에게 적발된 것이었다.

여기서 10년 전이 지칭하는 것은 바로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한일합방, 즉 경술국치였다. 그러니까 조선 백성들이 경술국치로 인해 일제에게 국권도 빼앗기고 주권도 빼앗기고 자유도 빼앗겼다는 내용을 연극 대사에 넣었던 것인데 그것이 일경에게 발각된 것이었다.

순회공연을 주도한 포석이 이런 대사를 끼워넣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경술국치 때 울분을 삭이지 못했던 어린 나이의 포석이나,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무모하게’ 북경행을 시도했던 ‘영웅주의’의 포석이나, 유학비를 벌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며 궂은 일을 하다 일제의 침탈을 생생하게 목격한 청년의 포석이나, 그리고 조선 백성들의 비참한 삶의 현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포석이나, ‘적진’의 한가운데인 동경에 유학하면서 민족주의와 조선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끝까지 간직하려 했던 포석이 자신이 주도하는 연극을 통해 조선 백성들에게 민족주의와 독립심과 애국심을 심어주려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도중에 막을 내리게 됐지만 조선 백성들과 같이 호흡하며 포석은 많은 것들을 느꼈다. 그리고 조선의 독립이 요원한 것만은 아니라는 확신도 갖게 됐다.

그 당시 얼마나 조선 백성들로부터 포석의 순회공연이 얼마나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지 동아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첫날은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정작 전부터 만원으로 성황. 동우회 연극단은 조선 지방을 들어서기 시작하자 부산(釜山)서부터 제1막을 공개하야 이르는 곳마다 끓는 듯한 환영을 받고 지나간 이십육일 오전에 경성에 도착한 이래로 며칠 동안은 큰 기대 속에서 모든 설비를 진행하던 중 재작일 밤에도 공두만 단성사(團成社)에서 첫무대의 휘장이 열리었다.

- 동아일보, 1921년 7월 30일

극의 진행함에 따라 군중은, “잘 한다. 참 잘한다. 과연 잘한다” 하면서 그 손바닥에 못이 박이도록 뚜드린다. 그럴 뿐외라 관객은 서로 바라다보면서 연해연방 이것이야 말로 참 연극이로구나 하는 말도 들리었다. 그중 더욱 김영일의 친구 박대연(朴大淵)으로 분장한 허하지(許河之)씨의 무대상의 그 일거일동은 더욱 정표하였다. 부자 학생 전석원과 격투가 일어나는 데에 이르러서는 그놈 죽여라, 하는 부르짖음이 극장이 떠나가도록 사방에서 들렸다. 그리고 제삼막 김영일이 죽는 곳에 가서는 탄식하는 사람, 우는 사람, 극장은 전혀 일종의 초상집을 이룬 듯하였다.

- 동아일보, 1921년 7월 18일

 

순회공연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 김우진이 양주 한 병을 들고 포석을 찾아왔다.

포석은 주량이 세지는 않았지만 술 먹는 분위기를 즐겨하는 편이었다. 문인들은 포석과 같이 술자리 하기를 즐겨했다. 술자리에서 포석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잔잔한 미소로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 때문에 소위 주당(酒黨)들은 포석을 붙들어 놓고 자신의 흉금을 털어놓으며 정신적 위안을 얻곤 했다.

“명희, 나 실로 가당찮은 고민이 있네.”

“수산(김우진의 호), 무슨 일인데 그렇게 표정이 진지한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네.”

“누구? 동경에 있는 간호사 말인가?”

 

(14) 윤심덕(尹心悳)

 

1897 평양 출생, 1926년 8월 4일 현해탄에서 사망. 성악가·배우. 호는 수선.

1918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원도 원주에서 1년간 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 그해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우에노(上野) 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했고, 1921년 동우회에서 주최한 국내순회공연에 참여했다가 김우진을 만나게 되었다.

1922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조교로 1년 간 근무한 뒤, 1923년 귀국했다. 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선생으로 있으면서 극예술협회 등의 연극공연에 출연해 풍부한 성량과 뛰어난 외모로 이름을 떨쳤고, 1925년 김우진의 권유로 토월회 무대에도 섰으나 연기력이 부족해 그만두었다.

당시 성악만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어 대중가요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방송에 출연하거나 레코드를 취입하기도 했다. 1926년 여동생 성진의 미국유학길을 배웅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닛토(日東) 레코드회사에서 24곡을 취입하고는 귀국길에 김우진을 만나 현해탄(겐카이나다)에 몸을 던져 함께 죽었다. 이는 신극운동 때의 유명한 연애사건으로, 박승희는 이들의 사랑을 주제로 한 ‘사(死)의 승리’를 토월회 재기공연 때 발표하기도 했다.

이바노비치 작곡인 ‘도나우 강의 푸른 물결’에 자신이 직접 노랫말을 쓴 ‘사(死)의 찬미’는 그녀가 죽고 난 뒤 더욱 유명해진 노래이다.

 

(15) 홍난파(洪蘭坡)

 

1898년 4월 10일 경기 화성 출생, 1941년 8월 30일 서울에서 사망. 작곡가, 바이올린 연주자.

1925년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으며 국내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했다. 홍성유·이영세 등과 난파 트리오라는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3중주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1918년 일본에 유학하여 우에노 음악학교에 입학했다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했다.

귀국 후 매일신문사에서 기자생활도 했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1920년 4월 바이올린곡으로 작곡한 ‘애수’라는 곡의 악보를 그의 단편소설집 ‘처녀혼’의 끝에 실었는데, 1925년 김형준에게 노랫말을 부탁하여 지은 노래가 ‘봉선화’다. 1937년 한국 최초로 교향곡 연주를 지휘했는데, 곡은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C장조 ‘주피터 교향곡’이었다. 1941년 늑막염이 재발하여 경성요양원에서 죽었다. 주요 작품으로 바이올린 곡 ‘애수의 조선’, ‘로만스’, ‘여름밤의 별들’, ‘라단조 가보테’, ‘동양풍 무곡’이 있고, 가곡 ‘성불사의 밤’, ‘사랑’, ‘금강에 살으리랐다’ 등이 있다.

홍난파의 대표곡인 ‘봉선화’를 비롯해 그가 작곡했다는 여러 곡들이 친일 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을 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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